<직지포럼>정덕기 충남역사문화원장

지난 5월 18일 태안군 근형면 대점 인근 바다에서 쭈꾸미 통발에 걸려 올라온 청자 대접이 천년만에 수면 위로 햇살을 받게 됐다. 이어 6월 3일에도 역시 근형면 마도 인근 바다에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대접과 접시 등이 인양됐다.

이 오래된 유물이 발견된 장소는 조선시대 조운선의 항로와 일치해 이 일대 해역에 각종 해저유물이 다량으로 매장돼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발견된 청자대접은 민무늬에 비색이 선명한 12세기 무렵 왕실용이나 귀족용으로 제작된 것과 투박한 생김새의 접시는 서민용으로 보이고 있다.

고려청자는 주로 서남 해안에 분포돼 있는 가마에서 만들어 졌는데 특히 전라도 지방에 많은 가마가 밀집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전남 강진과 전북 무안은 청자의 주산지로 유명하며 특히 부안은 청자 뿐만 아니라 고려 백자도 다량 출토된 지역이다. 이 두가마에서 생산된 청자는 양질(良質) 청자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한 왕족과 귀족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청자는 9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여러 가지 기법으로 제작됐으며 12세기 전반이 절정기로 보여진다. 그 아름다운 청색은 하늘을 상징하며 불교적인 天下世界를 연상케 한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무문청자가 주류를 이뤘으나 11세기 경부터는 기벽에 다양한 문양을 새기면서 음각, 양각, 상감, 투각 등의 청자로 발전해 나간다.

예술적 가치를 지닌 청자로 평가되는 것은 색깔, 형태, 문양 등이 아름답고 제작기법이 정교한 양질 청자이다. 양질 청자는 초기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12세기 부터는 고려적인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해 섬세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조형미를 지니게 된다. 11세기말에서 12세기 전반에 걸쳐서는 이러한 특징을 갖춘 상형청자(동물이나 실물 및 인물모양의 청자)가 널리 제작되어 진다.

이처럼 세련된 기형을 지니며 푸른색의 유약은 광택이 은은하고 안정감을 주는 반투명의 비취색을 띠게 된다.

이러한 양질 청자에 비해 인천시 북구 경서동과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는 녹청자로 불리는 거친 청자도 제작됐다. 이것은 통일 신라시대의 토기 바탕흙을 정선해 그 위에 고화도의 회유를 입힌 것으로 녹갈색이나 황갈색을 띤다. 녹청자는 통일 신라시대 말부터 지방수요층을 대상으로 해 지방가마에서 구워낸 것이다.

한편 청자를 종류별로 나눠보면 순청자, 상감청자, 철회청자, 진사채청자, 연리문청자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순청자는 산화철과 산화동과 같은 광물질 안료로 시문하지 않고 태토 위에 유약만 입혀 소성한 것으로 무문, 음각, 양각, 투각, 상형청자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상감청자는 청자의 소지로 성형된 기벽(器壁)에 표현하고자 하는 문양을 파내고 그 홈에 백토나 적토를 매꿔 넣어 문양이 나타나게 한 다음 초벌한 후 유약을 입혀 재벌한 청자를 말한다. 고려시대 문화 절정기인 12세기 전반에 많이 제작됐다. 철회청자는 철분이 많이 함유된 적토를 물에 개어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유약을 입혀 소성시키는 기법이다. 비색을 띠는 순청자나 상감청자와 달리 황갈색이나 녹갈색을 띠는 경우가 많으며 그림의 필치가 추상적인 것이 그 특징이다.

진사채청자는 산화동을 주성분으로 해 진사채를 초벌한 기면위에 채색, 환원염소성을 시켜 진홍빛은 띠게 만든 것을 의미한다. 이 역시 고려시대 전성기인 12세기 전반에 많이 발달했다. 마지막으로 연리문청자는 청자의 태토에 백토와 적토를 합쳐 다시 반죽하면 세가지 태질이 서로 번갈아 포개져서 몰리문 비슷한 무늬를 나타내게 된다. 그 위에 투명유를 씌워서 구운 청자를 연리문청자로 부른다.

위에 열거하듯이 청자도 여러 종류가 있고 기법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당시 고려청자는 아랍상인들이 대량으로 구매해갔던 세계적인 공예품이었으며 만드는대로 팔려나갔던 고려의 주력 수출품이었다. 이번 태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청자로 미뤄봐도 고려는 청자 수출대국이었으며 문화 선진국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멸망하고 이어 중국의 송나라도 멸망하면서 청자 제작 기술이 전승되지 못하고 그 대가 끊긴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정덕기 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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