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로서 마음의 병을 다루기 시작한지도 수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지만, 가끔은 아직도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을 후회할 때가 있다.타인의 정신을 치료하는 진료에 있어서 가장 유용한 도구는 나 자신의 정신이기에 하루 종일 내 정신은 대단한 노동 강도를 견뎌 내야하며, 반면에 내 몸은 의자에 딱 앉혀진 채로 극도의 저활동 상태를 견뎌야 한다.
요즘 의사들의 수입이 전반적으로 낮아져서 상대적 빈곤감을 덜 느끼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신과 의사의 수입에서 직업의 만족감을 찾기도 어렵다.
그래도 다행히 이런 불만족을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타인의 정신을 치료하는 좀 더 유용한 도구로 만들기 위해 내 정신을 계속 갈고 닦을 수밖에 없는 직업특성으로 나이가 들면서 주름살과 흰머리만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씩 점점 더 알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래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라는 말대로 인생의 끝자락에 도달하게 될 터이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내가 살고 가는 구나'라는 것이라도 체감하고 산다는 게 참 다행이다.
삶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지로 삶을 산다는 인식하에, 삶에 대해 '의지', '극복', '노력' 등 이런 단어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내 진료실에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난 이런 말을 해준다.
"저는 지금까지의 내 삶을 아무리 되돌아 봐도, 힘들어서 해내기 어려웠는데 내 의지로 극복해서 해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힘들어도 참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의 열정이 일어났고, 그래서 힘든 줄 모르고 그 열정에 따라 해낸 것뿐이었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의지를 발휘해서 극복해서 해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다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 것뿐이다."
어느 순간에 나를 해내도록 열정과 성취욕을 불러 일으켜서, 웬만한 고통은 그리 힘들게 느끼지 않도록 날 만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해야 하는데도 날 주저하게 만들기도 하는 내 마음속의 타자가 엄연히 있다는 인식은, 날 삶에 대해 겸손하게 만든다. 그리고 혼자 있어도 항상 할 일이 있게 만든다. 허무감이 스며들 수 있는 나의 빈공간과 시간을 내 안의 타자와의 조화라는 과제에 집중하게 만들고 삶을 좀 더 역동적이고 신비롭게 느끼게 만든다.
중년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사는 게 뭐 있어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라는 인식 밖에 얻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나 취미에 몰두 하며 삶을 가꿀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인식 속에 살아 갈 때, 기껏해야 "난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야"라는 말로 항상 자위를 하며 삶의 덧없음을 메꾸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안의 타자는 내안의 상처받은 아이의 수준이 아니다. 언제나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반응하고 내 삶의 태도에 대해 지지하기도 하고 교정해주며 때로는 경고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삶의 고통을 인내하며 진정성 있는 태도를 겸손하게 견지하고 있으면, 불현듯 뜻하지 않게 새로운 인식의 차원으로 날 이끌어 새로워지게 돕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자신의 의식만 가지고 혼자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길 바란다.

한병 진<마음편한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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