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고등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 둘이 있다. 말썽꾸러기들은 아니지만, 가끔씩은 화를 낼만한 행동을 해서 매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실제로 매를 들기는 했지만, 때린 적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세울만한 교육철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맞아야 할 대상이 내 자식이었고, 매를 든 나를 때리지 못하게 몸으로 막았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자식이라는 감정적 판단과 나의 행동을 통제했던 물리적 힘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하면 정확하다.

학생체벌에 대한 찬성과 반대 논쟁으로 사회가 요란하다. 논쟁의 불을 지핀 곳은 서울시교육청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오는 2학기부터 서울시내 모든 유치원과 초ㆍ중ㆍ고교에서 학생체벌을 전면 금지하는 방침을 정했다. 체벌을 찬성하는 주장도 강력하게 존재하고 실행에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남아있지만 대안을 찾는 지금 분위기로는 실행에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해묵은 논쟁이지만 학생체벌이 다시 쟁점화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내용이었다. 새롭게 선출된 일부 교육감들의 주요 공약에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슈화시기를 저울질 했을 교육감들에게 최근의 '오장풍' 사건은 학생체벌 등이 담겨질 학생인권 문제를 공식화시킬 수 있는 촉발기제였다. '오장풍'은 서울 어느 초등학교 오모 교사의 별명인데, 학생들을 때리면 바람에 쓰러지듯 한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폭력적 수준의 체벌을 가한 이 사건은 학생체벌을 '교사에 의한 학생폭력'으로 전환시켰고 다시는 발생해서는 안 되는 학생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문제로 부각시켰다.

그동안 학생체벌이 폭력이 아닌 '사랑의 매'로 교육현장에서 용인된 것은 사실이다. 교사는 교편(敎鞭)을 잡는다고 하는데, 이때 편(鞭)자는 회초리나 매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을 활용한 교육적 효과에 대한 연구결과는 부정적이다. 벌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억제시키기 위해서 사용된다. 그러나 심리학자 스키너는 벌을 받는 동안에는 효과가 있지만 벌이 멈추면,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은 더 많이 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벌과는 반대로 칭찬은 효과가 분명하다. 고래도 춤추게하지 않았는가. 칭찬은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지시가 되지만, 벌은 '하지 말라'는 지시일 뿐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벌을 피하지 못하고 겪으면서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학습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피하려고 하는 노력과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교육을 목적으로 시도한 체벌이 비교육적이라는 사실에 실망스럽다.

교육현장에서 학생체벌이 정당하다고 옹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필요하다는 주장은 존재한다. 사실 체벌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체벌한 스승은 존경을 받았고, 체벌제도는 문화였다. 학생 스스로 매감을 가지고 서당에 갔고, 아버지는 자식교육 잘 해달라고 훈장에게 매를 들고 찾아가는 체벌의 철학이 있었다. 일부이지만 회초리가 손과 발로, 체벌이 폭력으로 변질된 지금과는 분명 다르다. 과거의 체벌문화를 복원할 수 없다면, 이제는 체벌 없는 학교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체벌금지를 성공적으로 뒷받침하는 확실한 대안마련을 기대한다.

▲ 윤석환 충남도립청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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