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기위해 지하도 입구 계단에 섰다. 자주 다니던 길이었는데 계단을 바라보니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그 순간 붉은 색 철 계단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럴 때 넘어지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휘청 했다. '오 마이 갓' 이라고 외친 순간 나는 무릎을 꿇었고 창피한 생각에 얼른 수습하려고 팔을 뻗어 바닥을 디뎠다.

다시 한 칸 더 기우뚱한 몸은 한 바퀴 굴러서 머리가 아래로 향하고 등이 계단에 부딪치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실크 블라우스 때문일까 아니면 철 계단이 너무 가파른 것일까. 낙하는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손을 허우적거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몸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속도만큼이나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119신세를 지겠구나, 머리를 부딪치면 안 되는데 왜 아무도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 거지?, 머리를 들어야 한다, 머리를.' 등에 부딪치는 금속성이 섬뜩했다. 심한 통증으로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때 쯤 누군가가 내 어깨를 받쳐서 나를 멈추게 했다. 허공을 사래질하던 내 손은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바들바들 떨었다.

정신을 차리니 올라간 치마가 눈에 띄었다. 그 와중에 한손으로 치마를 수습하자 괜찮으냐는 물음과 함께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 남자는 떠났다. 아주머니 한분이 나를 부축했다. 뒤를 돌아 올려다보았다. 계단이 위협적인 붉은 색을 띠고 너울 거렸다. 내가 괜찮은지 나도 궁금했다. 일어서 보았다. 심한 통증이 왔다. 누군가가 구두를 가져다주었다. 핸드백은 손에 쥐고 있었는지 바로 옆에 나동그라져 있다. 내 옷을 털어주시던 아주머니가 옷이 찢어졌는데 몸은 괜찮으냐고 한 번 더 걱정을 하신다. 어깨가 드러나게 찢어진 블라우스를 손수건으로 가리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 지하철을 탔다, 혼이 나간 듯 한 내 모습을 쳐다보는 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서둘러 일상 속으로 떠나버린 그 남자처럼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생각에 몰두해 있느라 내 모습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상반신이 반 이상 드러난 옷을 입는다고 해도 별스럽지 않은 요즘 손수건으로 등을 가린 패션쯤이야 대수로울 게 있으랴.

긴 통로를 걸었다. 뼈가 부러 졌을까? 등에는 얼마만큼 상처가 났을까. 치마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본다. 고단한 하루를 마친 노동자의 작업복처럼 구겨지고 남루하다. 등의 통증에 신경을 쓰며 몽유병 환자처럼 한발 짝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지하도가 강물처럼 출렁거렸 다. 사람들의 어깨가 발을 디딜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했다. 구토를 참느라 식은땀이 흘렀다.

사무실에 들어와 거울을 보니 옷보다 더 측은한 것은 얼굴과 머리다. 한쪽 볼에 붙은 먼지와 헝클어진 머리가 낯설다. 왈칵 설움이 밀려온다.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지도 않은 상황인데 순식간에 몰려왔던 사람들이 서둘러 다 떠나 버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목울대를 꽉 채우고 올라왔다. 세면대에 엎드리자 두려움과 외로움이 목구멍에서 헛바람을 내 놓는다. 혼자이기 때문에 나를 긴장시켜 이곳 목적지까지 오게 한 무의식이 주저앉는다. 잠시 혼절하듯 책상에 엎드려 고른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내 어깨를 잡아준 그 남자가 생명의 은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등에 약을 바르고 천천히 몸을 작동시켜본다.

붓지 않는 걸로 보아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단정하니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목숨의 안위가 궁금할 때는 찢어진 옷 따위가 상관이 없더니 체면이 챙겨진다. 새 옷을 사 입고 지하도를 오르며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으로 가득 찼던 낙하의 순간을 떠올렸다. 오늘 하루는 몇 년을 산 기분이다. 모든 이들에게 실없이 웃어주고 싶어 마주 오는 이에게 반갑게 눈길을 맞춘다.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그 남자가 지나는 이들의 모습에 오버랩 된다.

▲ 유인순 천안수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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