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일보]살아가다 보면 이것저것 해보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게 생기게 마련이지만, 대게는 마음에만 품다가 바쁜 일상 때문에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러다, 진취적으로 추진하는 젊음도 어느 정도 지난 나이이고 세상의 잣대로 볼 때 어느 정도의 성취는 이룬 사람인데도, 계속 뭔가를 배우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내가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움에 삶이 정체됐다고 느끼며 불안해지기 십상이다.

나도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사람이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새벽에 일어나 외국어를 공부하기도 하고, 컴퓨터를 혼자 조립해 보겠다는 생각에 컴퓨터 관련 서적을 사고, 악기 연주자를 보곤 그 악기를 배우고 싶다는 욕심에 배우겠다는 계획을 세우고는 했다. 심지어 바쁜 일상 때문에 배움의 욕구를 미룰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에 직업을 중단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배움에 대한 욕구와 공허함

이런 시간 속에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이것저것을 기웃거리며 그러다가 어느 덧 마흔이 되었다. 그런데 마흔에도 이십대에나 어울릴 이런 생각들이 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서점에 가면 여전히 읽어야 할 책이 많았고 그 책들이 내가 꼭 봐야할 아주 소중한 비밀의 내용이라도 품고 있는 듯이 생각이 되어 마음이 다급해지고는 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로 읽고 싶은 책을 다 읽고, 배우고 싶은 것을 쫓아다녀도 내 마음 속에 결핍감은 해소되지 않고 그대로 잔존한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는 열심히 새로운 것을 보고 들어도 뭔가 다른 것이 있을 허라는 마음에 쉰이 되고 예순이 되도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에 당혹스러웠다.

그 나이가 되도,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이 세상에 아직도 많이 있고 내가 아직 그런 것들을 다 갖추지 못했다는 부족감은 지금과 같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죽을 때까지 계속 익히는 미완성이 곧 삶'이라는 말로 위로 받을 수는 없었다.

삶에 주어진 시간의 한계

난 내가 가야 할 길을 모른 채, 많은 책들을 바라보며 저런 다양한 책들 속에 저마다 내가 알면 좋은 많은 것들이 담겨있을 거라는 인식의 태도를 버리고 싶었다. 적어도 중년이후의 삶에서는 내가 읽어야 할, 깊이를 추구해야 할 나의 자리는 아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마음에서 하고 싶다고 욕구로 느껴지는 것, 배우고 싶다고 바라게 되는 것이현실에서의 구체적인 그것을 뛰어 넘어 현실에서의 그것이 궁극으로 뜻하고 상징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에서 원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개개의 구체적인 것들을 모두 쫓아서 하기에는 내 삶의 주어진 시간이 너무 적었다.

더 이상은 구체적인 것에 묶여서 실체에 도달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곰곰이 내가 원하는 것의 뒷면을 생각해보면, 대게 두가지에 도달한다. 내가 느끼는 내 마음속의 모호한 미지의 것을 밖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과 계속 흘러가는 삶과 그 속에 녹아 있는삶속의 더 큰 배경을 알고 싶다는 의문이었다. 결국은 저것을 하면 그것을 얻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실 속에서 할 일 많아지는 것이었다.

젊음을 잊고 계속 배우고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난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성장할 것인가? 성장을 멈추고 이미 이루고 익힌 것을 뒤돌아보며 깊이 들어가는 것을 언제까지 미룰 것인가? 세상의 유행과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는 내가 점점 편하게 느껴지고 남아 있는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도 마저 버리고 이미 나를 스쳐간 삶 속에서 새로운 눈을 떠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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