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폭염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줄기에서 땀이 마구 흘러내린다. 기력마저 쇠잔하여 매사에 의욕이 없고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위대한 여름이다. 하지만 아무리 무더워도 계절의 탓이니 어찌 하랴.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무더워도 머지않아 가을은 올 것이다. 하여 릴케의 기도소리가 가까이 다가올 날도 있으렷다.

말복이 지나도 아직은 이글거리는 햇볕이 여전하다. 이맘때면 누구랄 것 없이 폭염나기를 위해 집을 떠나 바다나 계곡을 찾아간다. 텔레비전에선 뒤늦게 휴가를 떠나는 이들의 차량이 고속도로마다 꼬리를 물고 있다. 더위와 일상에 지친 이들이 산이며 계곡, 바다를 찾아간다. 나도 지난주에 며칠 휴가를 다녀왔다. 오랜만에 일상에서의 탈출이었다.

산과 바다로 여행을 다녀보았지만 마지막 휴가일은 서늘하리만큼 시원한 북극의 바람과 얼음 한 조각이 못내 아쉬워 아이와 시내의 한 도서관을 찾았다. 방학 중이건만 한 여름의 독서가족들이 도서관에 가득했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옹기종기 독서삼매에 빠진 모습들을 보며 박목월님의 "술 익는 마을 마다 타는 저녁 노을" 대신, "책 읽는 마을마다 피어오르는 행복 노을"이 연상되었다. 그랬다. 폭염나기는 반드시 바다나 계곡을 찾아 나서는 일만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우리나라에서 이제 폭염주의는 여름나기의 일상사가 되었다. 지구촌 곳곳에서 땡볕더위로 인한 각종 재해도 그치지 않고 있다. 유럽과 중국, 미국 등지에서도 폭염으로 아우성이다. 기상이변으로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구인 전체가 공통으로 인식되어졌으리라. 그러나 여름마다 점차 용광로처럼 달궈지는 지구를 식힐 수 있는 묘안은 없을까?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폭염나기는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다. 한여름의 강렬한 햇살이 없다면 가을의 풍성함이 영글기는 힘들다. 한창 푸른빛을 띠어 가는 벼는 뜨거운 햇볕의 입김이 있어야 이삭이 패고 낱알이 익는다. 가을이 제철인 과일이 탱글탱글하게 윤기가 나려면 한여름 뜨거운 태양의 기운을 먹어야 한다. 너무 뜨거워 사람을 지치게 하는 태양이지만, 결실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이런 무더위에도 자신을 담금질하고 있는 이들이 있어 우리들 가슴을 뜨겁게 한다. 이시종 도지사님은 얼마 전 발에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발톱의 양끝이 살 속을 파고 들어가는 내성발톱 통증으로 발톱 전체를 뽑는 수술을 받았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하였으랴. 이동의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럼에도 보조신을 신고 지역 예산확보와 현안 해결을 위해 중앙부처를 방문하는 열정을 보여주어 도민들을 감동시켰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현재의 지루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피해 활력소를 얻는다며 산으로 바다로 휴가를 다녀온 것이 그만 부끄러웠다.

폭염에 시달리느라 시간가는 줄 가늠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입추도 지나갔다. 그러니 이제 더위 타령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폭염이야 막바지 기승을 부리겠지만, 절기의 법칙을 비켜가기는 어려운 일이 아닌가. 모든 건 생각 나름이겠다. 그래 머지않은 새로운 계절을 설계하며 독서삼매경에 빠져보는 것도 폭염나기에 좋은 방도는 아닐까 싶다.

▲ 김정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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