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가슴이 봉긋하다. 그러고 보니 미소도 해맑다. 입가에 잔주름이 조물조물 한데도 표정이 어떻게 그렇게 맑은지. 틀니가 제 이처럼 가지런하고 희게 빛난다. 아가씨라 그런가?

어린이날에 만난 그녀는 어린이처럼 보였다. 요양원시설에서 어르신 고향방문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여 하루 시간을 냈다. 고향이 없으니 목욕이나 하고 싶다는 그녀와 초정탄산온천으로 향했다. 한적한 길을 택해서 충북 내수로 향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이지만 시내를 벗어나자 마음이 확 트이는 게 나도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픈 욕구가 솟았다. 요양시설에서 알려준 이름과 나이 외에 그녀가 미혼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나를 낳고 바로 엄마가 돌아 가셨는데 다섯 살에 아버지 까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되었지. 그런데 고맙게도 아버지 친구 분이 거두어 주어서 그 댁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식모나 다름이 없었어. 찬물에 빨래를 해서 언제나 손등이 갈라 터졌고 학교도 가지 못했어. 그 집에 삼남매가 있었는데 나는 그 집의 막내가 되었었지. 먹을 것이 늘 부족했어. 배고픔을 참기가 어려워 옷 보따리 하나들고 서울로 도망 와서 부잣집 식모살이를 했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밖에 없었거든. 열다섯 살부터 남의 집 식모로, 점원으로 안 해 본 고생이 없었는데도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어. 내 부모들처럼 나도 아이를 남겨놓고 죽어 버릴까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결혼을 할 수가 없더라구. 아픈 마음으로 헤어졌지. 그러그러 마흔이 넘으니까 혼담도 사라지더군. 살자고 쫓아다니는 남자도 없고, 그래서 여태 혼자 몸이여".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의 얘기 하듯, 창가 부르듯 그렇게 주절주절 흘러나온 한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자꾸 내 몸에 부딪혀서 매듭으로 묶였다. 욕구 불만으로 보낸 내 일상의 가벼움이 그 매듭에 걸려 풀썩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엄청난 얘기를 그대로 듣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겨우 꺼낸 말이 못된 자식 두어서 맘고생, 몸 고생 하는 것 보다는 혼자 몸이라 나라에 의탁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는, 꺼내 놓고도 무안하기 그지없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내가 민망했다. 분위기 반전을 위해서 한마디 던졌다. "그래도 뜨거운 연애는 해보셨지요?"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기꺼이 대답했다. "그럼, 해 보았지. 그 추억으로 평생을 살아가고 있지".

연애의 추억으로 살아가면서도 가슴속에는 언제나 부모를 여의고 눈칫밥을 먹는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결혼도, 자녀 출산도 못한 채 결국은 요양시설에 의탁 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할머니를 보며 몸이 두 살에 멈추어버린 아기가 생각났다.

서울 홍파 복지원에 있는 막내, 대부분 정신장애나 지체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버림받거나 부모가 부양 능력이 없어 위탁된 아이들이 그곳에 있다. 다른 아이들은 보기에도 장애가 금방 눈에 띠였는데 그 아기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평범한 돌 박이 같았다. 아기 밥을 먹이고 트림을 시켜주니 한손으로 내 젖가슴을 만지며 곤히 자는 모습이 천사 같은 아기모습이었다. 그 아기가 왜 수용 되었는지 묻고는 충격이 컸다. 그 아이가 일곱 살이란다. 앞니도 두개밖에 나지 않았고 누워서 옹알이를 하는 그 아이가 일곱 살이라니. 내가 몇 년이 지난 후에 다시 그곳을 찾아가도 그 아이의 모습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을 거라는 것이 복지사의 설명이다.

몸의 성장이 멈추어 버린 아기와 부모를 잃은 다섯 살 박이 아기의 모습을 떠나지 못하는 할머니. 오월에, 나는 두 사람의 인생에서 내가 받은 축복의 깊이를 생생하게 느꼈다.

나는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녀 역시 아가씨니까 어르신이라는 말보다 언니가 더 좋다고 했다. 차안에 나훈아의 뽕짝이 쿵쾅거리자 친밀감이 돌았다. 옛날 노래가 좋다는 소리에 노래 부르기를 청했더니 '봉우리 꺾어 놓고 본체만체 왜 했던가~' 를 불렀다. 시처럼, 소설처럼 유행가 가사는 이어졌고 박수를 치며 활짝 웃었다. 점점 볼륨을 높이고 차안에서 두 여자가 목청껏 노래를 부르니 신호대기에 있던 옆 차들이 차창을 열어 힐긋 본다. 한없이 가벼워진 마음으로 옷을 훌훌 벗고 목욕탕으로 뛰어 들었다. 처녀 젖가슴에 비누칠을 하고 발가락을 꼼꼼하게 맛사지하며 닦아 주었다. 오늘 만큼은 그녀가 사랑 받았던 그 누구만을 추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 유인순 천안수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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