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삶에 대해 상처받고 분개하며 이해할 수 없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첨과 거짓된 태도를 서슴지 않으며 자신을 포장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현실에서 더 승승장구하며 보란 듯이 살지 않느냐고… 나쁜 짓을 한 전직 대통령이 떵떵거리고 살고 있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며 더 잘살고 있다고… 세계를 봐도,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 선진국인데, 피해를 먼저 보는 것은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와 아프리카의 빈국이 아니냐고….
속 생각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내가 매일 일하는 곳이기에, 이렇듯 삶과 세상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하며 답답해하고 심지어 억울함과 분노를 호소하는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된다. 어떤 때는 진료실에서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마치 내가 그런 삶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것처럼 내게 입이 있으면 삶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따지듯이 묻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때도 있을 정도다.
아주 중요한 삶에 대한 이해할 수 없음이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살아 가면서 다 '세상이 왜 저렇게 정의롭지 못하게 돌아갈까?'하고 답답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삶은 예술적 이치를 따른다는 거창한(?) 제목을 붙이고 글을 쓰며, 마치 삶에 대해 뭔가 큰 밑그림을 체득한 듯 오해받게 행세하고 있는 나도 매일 매일 아직도 절감하는 의문점이다. 하지만 이런 글을 쓰는 부끄러움을 잠시 외면하고 삶에 대한 짧은 견해를 피력해야 하는 나의 이시간의 운명을 받아들이려 한다.
이런 억울함을 느끼게 하는 삶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는 원인은, 가늠할 수 없는 규모의 위대한 삶과 그에 비해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한 우리의 안목에 있다. 우리는 삶이 내 눈에 분명하게 보이도록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의 원칙을 따르기를 바란다. 삶은 물론 이런 원칙을 명징(明徵)하게 따른다. 그러나 우리의 안목을 뛰어 넘는 거대한 규모로 따르며, 때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이 아닌 예측이 어렵게 불현듯이 분명한 권선징악을 보이기도 하고, 한참을 곰곰이 여러 각도로 살펴봐야 무릎을 치며 감동을 주는 최상의 권선징악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렇다 진료실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은 예술적이라는 사실이다.
삶이 예술적이라는 궤변은 관두라고 말하며, 척 봐도 정의롭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불행과 벌의 원인이 보이고, 선행의 결과가 예측 된다면 사람들이 다 올바르게 노력하며 사는 등 이점이 무척 많지 않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삶이 예술이 아니고 어떤 논리와 이성으로 어느 정도 생각하고 설명을 들으면 이해 할 수 있는 과학적 구조물 같은 거라면 어떤 단점이 생길까를 생각해 보면 그런 반문에 대한 답이 나올 성 싶다.
만약 삶이 그렇다면, 삶 속에서 겪는 괴로움이 줄어들진 모르나, 삶에 대한 이해 불가함이 없어지면서 삶이 뻔함으로 채워지며 삶의 감춰진 신비와 깊은 묘미는 사라질 것이다. 또한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펼쳐지고, 예측할 수 있고 삶을 내가 만들어 간다는 생각으로 삶에 대한 겸허한 관조를 잃어버릴 것이다. 즉 정직과 노력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생각에 삶에 대한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를 잃어버릴 것이다.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사막과 같은가?
이해하기 쉬운 그림일수록 한 두 번 보는 걸로 족하고, 일견 보면 이해 불가능한 미술 작품이 우리를 오래 머물게 하며, 언제 다시 봐도 볼 때마다 다른 감흥을 우리에게 전달하지 않는가? 삶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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