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간다. 웬만한 중형차 한 대 값이라는 오토바이를 따라 시선이 옮겨진다. 검은 선글라스에 헬멧을 쓰고 가죽점퍼와 가죽 바지에 부츠까지 갖추어 신은 그의 모습에 강한 남성적 매력이 묻어난다. 아산호의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휴식 중이던 의식이 반짝 고개를 든다. 그 남자가 다시 지나간다. 오토바이 뒷자리가 비어 있다. 노란색 머플러를 한 긴 머리의 아가씨가 허리를 꽉 잡고 매달렸더라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오토바이 소리만 들어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버지는 질주 족이었다. 수 십 대의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질주하면 지나는 이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한결같이 검은색으로 멋을 낸 운전자와 원색의 스카프를 두른 여성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깍지 낀 손으로 운전자의 허리를 바짝 조이고 환하게 웃었다. 오랜 당뇨로 투병을 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친구들과의 오토바이 질주는 그나마 남은 삶의 희망 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갈비를 정성들여 재우고 찰밥을 지어 아버지의 친구들과 그들의 여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장만했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오토바이 뒤에 선글라스를 끼고 매달려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그저 어머니였을 뿐이었다. 멋을 낼 줄도, 목젖을 드러내 깔깔깔 웃을 줄도 모르는 어머니였기에 그 대신 예쁜 언니가 아버지 등에 매달려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불편한 심기에 눈치가 보이는 것은 본능 때문이었으리라. 설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었던 열다섯 살의 본능. 그러나 어린 나에게 아버지의 모습은 제임스 딘처럼 야성적이고 매력 있어 보였다. 오토바이가 질주를 끝내고 골목으로 들어 올 때 친구들이 번쩍이는 오토바이를 만지작거리거나 부러운 듯 쳐다보는 게 으쓱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종가의 맏이로 태어나 동생은 물론 사촌동생들까지 거두어 가르쳤다. 사업이 번창할 때는 가족들에게 장손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다했고 걸인에게조차 입고 있던 비싼 털옷도 벗어주시던 아버지이었다. 기성복브랜드가 출시되면서 재봉틀장사는 문을 닫을 정도로 타격이 컸다.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아버지 건강이 악화 되었고 그의 희망이던 우리들은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노부모와 어린 칠남매를 건사하며 일 년에 열두 번도 넘는 봉제사를 책임지던 병약한 아버지의 짧은 인생에서 모닝커피와 오토바이와 선인장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더 불행 하셨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요즘 쉰 후반의 남자들에게 유난히 연민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아버지가 느껴진다. 아버지의 죽음이 영 믿기지 않다. 그들은 얼마나 건강하고 의욕적이며 젊게 사는가. 큰 딸의 결혼식장에서 사위보다 더 곱다는 말을 들으셨던 아버지의 윤기 있는 피부와 깊은 눈매가 그립다. 아버지와 영화를 보고 자전거하이킹을 하던 소녀시절에서 내 시계도 멈추었다. 얼마나 꿈결같이 짧은 순간이었는지. 당뇨합병증으로 급격히 쇠락해져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내 시집살이의 기억이 동일시되어 절벽의 단면처럼 내 코앞에 턱 버티어 섰다. 그리고 나는 앞만 보며 절벽 같은 생을 기어올라야 했고 아버지 나이가 되어가자 유한한 생의 시간에 오히려 평안해진다.

한 무리의 오토바이 군단이 떠들썩하게 아산만을 휘돈다. 내 아버지 또래의 남자들이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인생을 충분히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검은색 가죽바지에 탄력 있는 그들의 허벅지를 보자 점점 쇠약해져서 쉰아홉에 명줄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살점 없는 허벅지가 눈물에 묻어난다. 쉰이 넘어 공부를 하겠다고 도서관을 드나드는 나는, 아버지 닮은 명줄을 쥐고 나왔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더라도 내일 다시 도서관에 갈 것인가. 저들이 오토바이의 속도를 즐기듯 나는 책속의 세상이 즐거운가. 아버지의 일탈을 이해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나보다. 공부하느라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러 아산만 커피숍에서 오후 한때를 보내는 일도 아버지의 모닝커피처럼 짧은 순간의 행복인지 모를 일이다. 아직은 달려도 좋을 충분한 나이이다. 나도 그들도.

▲ 유인순 천안수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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