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 단풍이 예년만 못하다고 한다. 그마저도 때가지나 그림이나 사진을 통해서 여운을 맛보는 정도이니 애석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변덕스러운 날씨 탓이라고 하는데 지난여름 견디기 힘들었던 폭염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시 만나는 사람마다 비지땀을 흘리며 우리가 자초한 기후의 변화를 놓고 걱정하지 않았던가. 그걸 잊었을 리 만무한데 가을이라고 그 영향에서 비켜날 수 있으랴.

그런 와중에도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무심천 변에 만개한 갈대숲의 향연이다. 라인강의 기적을 빗댄 한강의 기적을 입에 올리며 낯간지럽게 느낀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짓이었다. 우리의 발전상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게 당연한 일이거늘 그 땐 왜 그랬는지. 아마 정권의 자화자찬이 귀에 거슬렸다고나 할까. 요즘 들어서 그와 유사한 현상을 자주 목격한다. 성숙한 사회로 가는 과정이라 여기지만 지나친 국가주의의 강조는 오히려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무슨 일이든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다고 하지 않는가.

청주 사람들에게 무심천은 고향과 같은 곳이다. 거기서 기적이 일어나고, 전설이 생기고, 신화가 꽃피어도 누구 하나 시비 걸 사람이 없다. 과장을 섞어 서문다리 밑에서 이무기가 용이 되어 솟음 치는 걸 보았노라고 떠벌여도 허~허 웃어넘길 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 무심천에 갈대가 만발했다. 천변을 따라 군락을 이루며 피어난 갈대숲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햇빛을 받아 반사하는 꽃술의 군무가 바다 속 물고기 떼의 유영을 보는 듯하고, 넘실넘실 춤추는 부드러운 몸짓은 꼬마 녀석들의 앙증맞은 운동회를 연상케 하니 이 가을, 그걸 바라보는 즐거움이 크고도 크다.

애증의 무심천, 아주 오래된 1970년대, 까만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연례행사처럼 무심천을 순례(?)하였다. 대개는 방학을 앞두고 설레는 학생들을 정화활동이란 명목으로 내몰았는데, 낫이나 호미 또는 삽을 들고 멀쩡한 풀숲을 헤치며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그때를 생각하면 실소가 절로 나온다.이제는 시대가 그랬기에 가능했던 유쾌한 추억으로 간직하려 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을 우리의 자화상이다.

세월이 흘러 무심천은 또다시 변모하였다. 가늠할 수 없는 영겁의 세월을 흘러왔을 젖줄은 거기에 기대어 삶의 똬리를 튼 이들에게 고스란히 자신을 내주었다. 자동차가 달리고 생활하수가 넘쳐나고. 개발의 시대를 지나 자각을 통한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오늘, 강은 우리에게 묻는다. 어떻게 공존할 것이냐고. 모래톱이 돌아오고 여울이 물결치는데 무슨 말로 답할 것이냐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개발의 칼날 앞에 무릎을 꿇었던 우리의 비굴함에 대해. 자연쯤이야 인간의 종속물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우리의 오만함에 대해.

갈대가 넘실대는 무심천, 넉넉히 우리의 국토를 감싸 안는 이름난 강 -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 사람과 함께 영원히 흘러야 할 그 강이 단풍으로 물든 가을을 담고 유유히 떠나간다. 우리의 각성과 겸손을 요구하며.

/김홍성 청주ymca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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