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장교 두 명이 북한군에 의해 도끼로 살해당했다. 키신저 국무장관은 데프콘3(전투준비태세)를발동하였고 전폭기 대대 및 해병대가 한반도에 급파되었다'.

도끼만행사건은 흉흉하게 민심을 자극했고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한여름 땡볕에 허위허위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공중전화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손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방위병으로 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 그 남자에게 전화하는 손이 떨렸다. 그 반가운 음성을 듣는 순간 다짜고짜 군번부터 물어 보았다. "아저씨 군번이 뭐예요?" 당장에라도 소집명령이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그렇게 절규하듯 군번을 물어 보았다. 오금이 저린 그 순간 그의 군번은 한자 한자 새겨지듯 내 머릿속으로 날아 들어왔다.92943032.

그 해 초겨울 그와 나는 결혼을 했다. 전쟁이 나서 만약에 전사하면 목에 건 군번이라도 찾아서 그를 그리며 혼자 살겠다던 순정이 그때는 있었다. 그 후로 군번은 내게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였고 그의 군번을 아는지 조차 모르는 채 삼십 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자들이 모여서 군대얘기를 하면 도무지 끝이 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지 아니한 것을 소망하는 법, 남편도 예외는 아니다. 어차피 군대 얘기가 반 이상은 허구라며 무용담을 만들어 낸다. 홍길동전을 지어낼 판이다. 허풍이지만 재미있기도 해서 나는 남편을 도울 요량으로 군번이야기를 했다. 내가 아는 군대 용어 중 군번만큼 자신 있는 게 또 있을까. 신나게 군대이야기를 하는 남편에게 지원사격을 했다. "남편 군번 외우는 사람 나와 봐요. 이 양반 군번이 92943032랍니다." 나는 단지 그 사람의 군대이야기를 조금 더 사실화시키려는 의도였을 뿐이다. 그 순간 남편의 얼굴은 굳어졌고 좌중은 긴장했다. "군번이 뭐라고요?" 나는 그 사람들이 내가 군번을 외우는 게 신기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고 더욱더 또렷하게 "92943032"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내가 분명히 무슨 실수를 했다는 걸 느꼈다. "그럼 방위잖아" 나는 방위라고 말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냥 군번만 말했을 뿐이다. 그날 이후 남편의 무용담은 들리지 않았다.

사실 8개의 숫자를 외우는 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몇 문장도 외울 수 있는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구구단을 외우고, 가까운 이들의 전화번호를 외운다. 그러나 그렇게 외워진 숫자나 문자가 기억을 유지하는 데는 유예기간이 있다. 전화번호도 자주 사용하면 외워지다가도 몇 달만 사용하지 않으면 까맣게 잊는다. 내 핸드폰 번호를 적어 달라는 사람에게 남편 번호를 적어 주어서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있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기억에서 물러나고 또 자주 사용하다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게 기억력이 아닌가.

요즘은 노래방에서는 가사를 보고 노래 부르고 핸드폰도 번호를 저장했다가 그냥 이름만 불러내서 통화를 한다. 그러다 보니 가사도 제대로 아는 게 없고 전화번호도 외우고 있는 게 별로 없다. 그런데도 유독 남편의 군번이 잊히지 않았다는 게 의아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숫자인가. 76년 여름에 그 숫자를 알아내고는 삼십여 년이 지난 다음에도 불현듯 저절로 그 숫자가 떠오른 것에 대해서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걸핏하면 열쇠도 잊어버리고 엊저녁에 세워둔 차의 위치를 몰라서 언제나 주차장을 몇 바퀴 씩 돌고야 마는 건망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가 군번을 외우고 있는 걸 남편은 심히 못마땅해 한다. 방위였으면 어떠랴, 그래도 국방의 의무는 다 한 게 아닌가.

요즘 교육원에서 '머리가 좋아지는 기억법'을 개강했다.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와 뇌의 구조에 관해 재미있게 강의를 해주시는 교수님과 기억법을 통해 감정평가사 시험에 합격한 분의 실감나는 강의를 들으며 나는 나를 신뢰한다. 손에 들고도 열쇠를 찾아 헤매는 내 노후 된 머리에 군번이 기억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기억력에 대한 작은 신뢰감이다. 내가 군번을 외우듯이 동물적인 감각을 모두 동원하여 기억법 수업을 듣는다면 그 감정평가사처럼 영어단어 일만 개를 외울 수 있지 않을까. 내 머리가 견디어 줄지 모르지만 말이다.

/유인순 천안수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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