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삼척(三尺)

할머니는 세어도 세어도 끝없는 세월 /한웅큼 움켜세다 하얗게 되셨다. /무명을 엮던 옛날 거스르며 /겨우 손바닥에 붙은 모래알 숫자를한알 두알 떼다보면 /어느 새 마른 눈엔 노을이 비친다./ 필자의 시 '모래알 세기'전문이다.

노약자석을 차지한 20대 여성이 할머니 대접은 커녕 꼲아보며 막말을 퍼붓는 도덕불감증 앞에말문이 막힌다. '나 내리니까 그때 앉아!' 반말로 불거진 동영상 이었다. 젊은이의 불손함에 주변 노인들은씁쓰레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지만,아랑곳하지 않고 '인간 봐가면서 건드려'오히려 억울해 격분을 섞는다. 지하철 승객들, 왜 한결같이 지그시 눈 감고 감각잃은 표정인지 알법하다. 부숙부숙한 임산부가 배를 안고 서있어도 3인분 노약자석을 누운 청년까지 눈뜨고 용서해 버리는 오류로 보편화된 세상.왜들 모진 끝으로 치닫는 걸까? 사람사는 사회란게 부끄럽다. 아직은 애교수준일지 모른다. 도덕성 회복, 그것이 올해 절실한 과제다.

-시끄러운 삼척(三尺)

원래 철없는 아이를 일컬어 삼척동자란 말을 써왔다. 그런데 요즘 '잘난 척, 아는 척, 가진 척'하는 삼척동자가 부쩍 늘어 정치권이 시끄럽다.얼마 전, 무기에 대해아는 척하다가 구설수에 올랐던 모당 대표는 비유법 사용을 잘못하여 입단속 중이다. 또 다른 당의 책임있는 사람은 섬뜩한 말을 날려 언어 폭력 수준을 넘었다. 스스로의 인격을 거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 갖가지 이야기를 하고 또 들으며 거기에 걸맞는 반응도 보인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과묵한 사람을 닮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답답할지언정 새치기나 결코 신호를 위반하여 조목조목 따지고 들이받는 흉함을 당하지 않는다. 어느 도단위 기관장님의 취임사가 1분으로 끝났다는 소식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쓸말이야말로 우리네 삶의 고집스런 갈등을 희석시키며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어렷을적 칠부자(아버지와 여섯아들)가 원탁 밥상에 빙 둘러 앉아 함께 식사 할 때면, 아버지는 '식불언'이란 말씀을 자주 하셨다. 우리는 할 이야기가 쌓였거나 웃을 거리가 튀어도 밥상 앞에서는 입을 닫았다. 부모 자식간 예절과 형제사이 위계까지 가정교육의 우선순위를 두었다.

-입찬 소리

말은참는 편이 훨씬 어렵다는 걸 자주 실감한다. 여백을 생각하지 않고모두 말해버리면 여물지 못하고 쭉정이가 많은 법.날이 갈수록 지난 날 고사리 손길 하나하나에 대한 소중함이 일고, 어른들 말씀 구절구절로 살아나 공교육이라는 엄청난 굴레 속에서 작은 실천의 두려움이 짙어옴을 어쩌랴. '미래 사회'의 경쟁력이야 말로 도덕성이나 사회윤리를 바탕으로 사람을 가장 우위에 두는 인간성 회복이다. 지식을 창의적으로 습득하고 응용할유능한 인적 자원 개발역시 바른품성이 먼저다. 아이들이 있어 희망이 보이고 젊은이가 있어 미래가 탄탄하며 어른이 있기에 진국으로 서려지는 세상 아니던가?스치듯 하신 선생님의 말씀이 잠재해 있던 위력을 끌어내어 성공의 묘약이 되고 어떤 경우는 가슴에 대못박은 상처로 남아 평생동안 누구도 치유 못할 상처로 곪는 일도 강건너 불이 아니다. 말을 안해서 후회하는 일보다 말을 많이하여 괴로운 일이 우리 주위에 너무 흔하다. 말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아름다울 수 있고 천박한 외설이 될수도 있다. '입찬 소리는 무덤 앞에 가서 하라.'는 속담을 들춰본다. 썩은 말을 마구 뱉고도 느낌조차 없는 짝퉁들, 그래서 지식인의 종언이라 했던가?삼척(三尺)의 파고에서 언제 쯤 벗어나 정신적 공복을 채우게 될지 아찔하다.

/오병익 청주경산초교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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