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희들 아이들은 단순하고 어른들은 복잡하다 라고 우리들은 편파적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의 경우가 많다.

아이들보다 어른이 복잡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이 때의 추억들 또는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을 상실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한 번도 아이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거나 그 둘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험적으로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려 보게 해보자. 사물을 보는 방식이 얼마나 자유자재한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어떤 년배에 도달하면 이 자유자재한 사물에 대한 관찰방식이 사라진 듯이 정지해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어른들이 그러한 천재적이고, 독자적 인 사물의 관찰방식을 쉽게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와도 같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발적으로 허용된 어떤 범위에서 그 먹이를 먹고, 자발적으로 허용된 범위에서 사물을 사고하는 가축이라고 볼 수 있다.

야수가 가축으로 변신 할 때의 그 고통스러운 노력을 무엇에 견 줄 수 있을까? 지금 어른들은 훌륭한 가축이 되어 있다. 그러나 가축 중에는 혹시 야수였던 시절의 번민이나 천성이, 아니면 그 악몽의 잔재는 아직 남아 있는지는 않은지 궁금할 따름이다. 또한 인간은 아직도 다소나마 옛날의 야수의 잔재성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도대체 이 세상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남들 보다 뛰어 나거나 주목받는 인간이 자기들 속에 같이 있다면 그 사람을 특수한 존재로서 부각시켜서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중상모략하려고 애를 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우리 주변에 흔히 발생하는 인터넷 상의 사람 죽이기가 그러한 실례인데, 어떤 특별한 천부적인 재주를 가진 친구가 있으면 그를 칭찬하고 격려하기 보다는 마치 무슨 변태인양 떠들어 대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정확한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겠구나"하는 장단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즉 이러한 것은 보상심리와 의타심에 의해서 스스로가 속물들이 되어가는 노력의 과정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속물들에 있어서는 천재란 그들에게는 그다지 기분 좋은 존재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어째든 끌어 내려야만 한다. 좋은 점만 있고 나쁜 것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속물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해야만 그들의 앞뒤의 계산이 맞아 떨어진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속물이 속물다운 정의감이며 그들의 수확이고 철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속물은 무언가가 특별하게 탁월한 인간을 보면 그들의 인생 장부에 앞뒤가 맞도록 반드시 무엇인가 '나쁜 것'을 결의해 버리고 시치미를 뗀다. 그리고 그 결의는 반드시 그들만의 만장일치로 가결된다. 그래야만이 그들은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며 인생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특별한 우월인종이 범속의 인간의 눈에 비친 형상이란 확실히 그러한 것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우리의 시각과 관점을 되돌려 생각해보면 이 속물들의 야비한 견해들이 어쩌면 확실하게 커다란 이치로써 존재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특별함으로써 더렵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사실이라면, 반대로 어느 정도로 그 이면에서는 역시 더럽혀졌기 때문에 특이성을 획득할 수 있다. 라고 하는 사실관계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당한 범위에서 위기와 불안의 세기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에 있어, 인간의 자아상실, 소외된 인간, 정신의 혼미함, 영혼의 방황들을 문제삼아 현대 물질주의 서구문명을 신랄하게 질타하고, 탄핵한 헷세의 사위엔과 하이데거의 평균화된 인간 다스만(das man)을 배격하고 자아의 실종을 내세우는 현대 인간들은 오로지 자기 안위만을 생각하고 모든 일들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속물들의 근성과 일맥 상통한다. 따라서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가끔씩 우리들의 의식 속에 물들고 있는 인습적인 사위를, 때로는 데미안처럼 사위의 전회를 해 보면서 구획된 인습으로부터 탈피하여 한번 쯤 비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박기태 건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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