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과 이성'의 저자 리영희 선생의 49재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현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명진 스님이 재(齋)에 참석하여 분향하면서 "극락에 가시라고 빌면 선생은 호통을 치며 이 세상이나 극락으로 만들라고 하실 것"이라며 고인을 회상하는 기사를 보았다. 우상이 판치는 시대, 슬픈 현실을 떠나지 못하는 우중(愚衆)들에게 예리한 죽비가 되어 가슴에 박히는 일갈이 아닐 수 없다.

종교생활을 하면서 거기에 함몰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교회에 발을 디딘 게 고등학교 때이니 곧 40년이 가까워 온다. 짧은 인생으로 치면 장구한 세월인데 아직도 혼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이런 고민을 하다니 한심하기까지 하다. 그에 비해 자기를 내려놓고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 좋은 이들을 보면 부럽고 놀랍다. 이들과 비교하여 혹시 내 유전자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고개를 저을 때가 있다. 왜 몰입하지 못할까. 순응하지 못할까.

새해 벽두부터 한국의 교회가 시끄럽다. 갖은 추문이 꼬리를 물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대부분 소문에 그치던 예전의 양상과는 거리가 있다. 실제로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는 그야말로 '대형사고'를 쳐서 그렇지 않아도 땅에 떨어진 교회의 체면을 일그러뜨려 놓았다. 사태를 들여다보면 내부의 권력 다툼이 목사 간 폭력으로 비화된 것이라고 하는데 순진무구한 성도들이야 무슨 죄가 있을까. 그저 믿고 순종하고 따른 죄밖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유독 강조했던 리영희 선생은 우상의 파편 뒤에 숨어있는 이성의 말살을 경계하여 종교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노라고 술회한 바 있다. 졸속 성장의 신화가 한국사회를 뒤덮어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선악을 따지지 않으며, 시비 가르기를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려는 풍조가 어느 새 가득하다. 이 틈새를 자본과 권력이 비집고 들어와 모든 것의 기준을 바꿔놓았다. 한국 교회가 치르고 있는 지금의 홍역은 거기에 편승하여 어두운 시대에 사표(師表)가 되지 못한 당연한 업보이리라.

우리의 비극은 이러한 양상이 종교를 넘어 정치현장에서도 나타난다는 데 있다. 백주 대낮에 해괴한 우상의 출몰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지도자의 신격화, 권력의 사유화, 지나친 선전선동, 모든 것에 우선하는 자본의 논리 등 어쩌면 그리도 판박이와 같은지. 마치 제정일치 시대로 회귀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대중의 무지를 파고드는 권력의 횡포는 독버섯과 같아서 성찬(盛饌)으로 치장하고 심판자의 모습으로 위장한다. 더 이상의 자정 능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스스로 독을 머금고 끝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햇살 가득한 오후, 창을 통해 볕이 쏟아져 들어온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세계, 천변만화하는 오묘함을 인간의 눈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성결하려 노력할 뿐이고 경외감에 꿇어 엎드릴 뿐이다. 새벽마다 기도하며 울부짖지 못하지만 이성(理性)에 기대어 하늘이 준 보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평화와 생명이 넘치는 세상이야말로 종교가 지향하는 이상향이라고 믿기에.

김홍성 청주ymca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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