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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死去來本來空 (생사거래본래공)
回顧首山碧水碧 (회고수산벽수벽)
千年石虎産麒麟 (천년석호산기린)
莫尋前三三後三 (막심전삼삼후삼)
나고 죽고 오고가는 것이 본래 실체가 없어라
머리를 돌이키니 산도 푸르고 물도 푸르도다!
천년 묵은 돌 범이 기린을 낳으니
달리 전 삼삼 후삼 삼을 찾지 말지어다.
지난 달 22일 입적한 법주사 회주 혜정스님이 입적 열흘전 맏상좌 지명스님께 읊어준열반송(涅槃頌)이다.지난 토요일 혜정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이 열린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호기심 반, 견문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법주사로 향했다.솔직히 혜정 대종사가 교계의 그렇게 큰 인물인지도 몰랐었고 평소 산문의 돌아가는 원리나 이치, 그리고 깨달음의 교훈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필자지만 다비와 화장과의 차이가 뭔지 궁금했다. 그러면서 오래전 인도 갠지스강가에서 목도했던 수많은 화장 의식이나 네팔에서의 같은 유형의 장례 모습을 떠올렸다.성스러움의 차이는 별반 없을데지만 격식이나 규모면에서 분명 그들과 다른 그 '어떤 것'이 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함은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정작 스님의 마지막 가는길의 과정을 지켜보며문득 치밀어 오는 것은 '나는 무엇이고 실체가 없는 삶의 종결이라는 것이과연 어떤 의미인가' 하는 자문이었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은 굳이 스님의 말씀을 들추지 않더라도 귀에 익어있다. 그러나 그래서 어떻하라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해답은 명쾌하지가 않았다.그저 각자가 판단하고 실행할 뿐이지 않은가. 영결식이 끝나고 영정, 부처나 보살의 무한한 공덕을 기린다는 번(幡) ,만장에 이어 법구가 스님들에 의해 다비장소인 연화대로 모셔지는 운구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사이 나무아미타불의 독경이 끊이지 않고 마침내 혜정대종사의 법구가 화구로 들어가고 "큰스님 불 들어갑니다"라는 거화를 알리는사부대중의 외침이 시방세계로 공명을 남기자 화염은 곧 바람을 타고 하늘을 삼킬 듯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연화대 주변을 둘러싼 경향 각처에서 모인 스님과 신도들은 나무아미타불과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자 가자 저 건너 언덕으로 가자 우리 모두 함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 영원한 깨달음을 얻게 되기를)를되뇌이며 큰 스님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 했다. 다비식을 지켜보며 저 불이 다 꺼지면 결국 그도 한줌의 재로 남을 것이고중생들 또한 똑같은 종지부에 달할 것이라는 묘한 상념에 잠시 젖게됐다.그러나 무엇보다 큰 스님이 말씀대로 '모두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고 천가지 기쁨과 만가지 즐거움도 모두 한토막의 봄꿈일 뿐(千喜萬樂一春夢)'이라는 경구가 산문을 나선 이후에도 오랜동안 가슴에 여운으로 남았다.
이틀뒤인 28일,서울 길상사에서는 무소유를 실천하고 1년전 입적하신 법정스님의 1주기 추모법회가 봉행됐다. 평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맑고 향기로운 삶의 괘적으로 대중에게 깊은 영감과 가르침을 남겼고 사술(詐術)이 횡행하고 시기와 이기가 판을 치는 사바세계 정화의 사표로 추앙받은 분이었기에 종단 지도자들을 비롯한 신도들 1천여명이 모여 생전의 법정을 기렸다. 그러나 요즘 불협화음에 쌓여있는 길상사를 보면 스님의 무소유정신에 큰 흠결이 생긴 것 같아 안타깝다.물질에 치우치는 중생들에게 버리고 또 버리라고평생을 훈도한 스님의 가르침을 잇기가 쉬운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청정의 울림을 구현하는 일도 욕심에 눈이 먼 필부필남에게는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그래도 법정스님이나 혜정스님이나공통적으로 빈손으로 가는 인생에 뭘 가지고 갈 것이냐며 내려놓을 것(下心)을 주문하고 있다. 고승들의 유지가 아니더라도 지금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 '내려놓음'이 간단치 않음을 그들도 간파는 하고 있을 것이다.그래서 가진자가 내려놓지 못하면 대다수 보통사람들이 비우는 게 더 쉬울 것이다.빈손 인생,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아닌가.
-한 줌의 재만 남는 인생
-욕심버리는 연습 쭉 해야
/이정 본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