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경칩도 지난 새봄이 되었다. 퇴근을 했는데도 해가 중천에 있는 듯하다. 따사로운 햇살이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을 해서 가까운 당산으로 가려고 새로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 앞을 지나자니 '주민센터'라고 씌어있다. 정겹고 전통적인 동사무소, 면사무소가 어때서 주민센터란 말인가? 유행처럼 기관명도 바꾸고, '센터'라는 이름을 남발하고 있다. 이처럼 한 군데의 이름을 바꾸는데 일억 원이 들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전국적으로 국민의 세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을까!

공연한 넋두리를 하며 오르자니 등산로가 질퍽거린다. 겨우내 꽁꽁 언 땅이 해동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가장자리로 자꾸만 밟아나간다. 모진 겨울 추위를 대견스럽게 이겨낸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다가 된서리를 맞는다. 동장군(冬將軍)보다 더 악랄한 것이 사람들이라고 단말마를 질러댄다. 그래도 낙엽들은 한 포기의 생명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덮어주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내 족속도 아닌 잡초까지 보듬어 준 낙엽은 이제 거름까지 되어줄 것이다.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니 여기저기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개나리꽃망울은 며칠 안에 터뜨린다고 하고, 참나무 밑에서는 가랑잎을 바스럭거리며 아직은 겨울이라고 밖에 나가면 춥다고 참으라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누구 말이 옳은 지 선뜻 편들기 어렵다. 문득 귀염둥이 우리학교 꿈나무들과 함께 와서 천진난만한 동심(童心)에 귀 기울이고 싶어진다.

우람한 소나무와 아까시나무는 듬직하게 견디었다고 해도 가냘픈 잡초와 진달래 가지들은 어떻게 월동했을까? 혹시 백 년만의 추위라고 하는 삭풍(朔風)에 아주 잠든 것은 아닐까? 새싹이 돋아날 때는 나무마다 제 빛깔이 있는데, 날이 갈수록 비슷하게 녹색으로 닮아가는 자연의 섭리도 신기하다. 봄바람이 귀엣말을 하여 준다. 개나리, 진달래를 앞세우고 앞산, 뒷산이 봄동산, 꽃동산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고.

자그마한 운동장 가엔 철봉, 온몸역기내리기, 마라톤운동 등 갖가지 운동기구들이 있다. 눈여겨보지 않고 쓰기만해서 이름을 몰라 미안하다. 전교생이 800여 명인데 수영선수들을 비롯해 내가 어린이들 이름을 불러주면 눈이 휘둥그레 하며 무척 좋아하는데...... . '교장선생님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하는 표정을 짓는 모습도 사랑스럽고 대견스럽다. 언제 누가 찾아와도 모두 반겨주고 함께 운동하여 주는 충직한 친구들이다. 봄바람에 실려 온 먼지를 닦으려니 옆의 참나무 기둥에 걸레가 걸려있다. 참나무에 못을 박고 수건을 걸어서 나도 모르게 못을 흔들어 보았다. 장갑을 낀 덕분에 못이 뽑혔다. 수건을 걸자고 살아있는 나무에다 시멘트못을 박다니...... .

내려오는 길에 소공원 입구에 입간판이 보였다. 살펴보니 6·25전쟁 때 공산군에게 이 고장을 빼앗겨서 온갖 고초(苦楚)를 겪었다. 선량한 약 450명의 우리 경찰, 공무원 등이 형무소에 붙잡혀 있다가 퇴각하는 인민군과 내무서원에게 무참하게 집단학살 당하고 매장당한 곳으로 추정된다니 섬뜩하다.

아직도 한국전쟁의 비극이 주변에도 산재하여 있는데도, 우리의 안보불감증 속에 북괴는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 같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산책길도 홀가분할 수 없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재스민 혁명바람이 동토까지 불어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구해주는 봄바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김진웅 청주 경덕초등학교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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