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장연덕 칼럼니스트

‘사람은 악한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초등학교 때 했습니다. 같은 반 여학생에게 장난이랍시고 교과시간이 다 끝나가고 학생들이 가방 싸느라 바쁠 무렵, 한 남학생이 그 여학생 뒤에 가서 바지 속의 속옷 안에 손을 넣었고, 제가 옆에서 그걸 보고, 곧장 선생님께 가서 일렀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저만 기억할 뿐입니다.

그 두 학생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두 사람의 표정은 정확히 기억합니다. 한 사람은 쾌감에 점점 물들어 기쁨에 넘쳐 어쩔 줄 몰랐고, 한 사람은 고통스럽고 놀랍고 수치스러워,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하며 그대로 바로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그 사건 전이었을까, 후였을까. 양주와 안주를 싸들고 오신 그 친구의 어머니의 곱게 화장한 얼굴과 긴 머리, 쟁반을 보자기로 싸들고 오신 그 술상의 모양새를 제가 기억합니다. 정말 희귀하게 생긴 양주병과 특별하게 볶은 쇠고기였습니다.

그 남학생은 그 사건 이전에도 같은 반이었던 친구인데, 그 남학생의 아버지는 떳떳치 못한 직업에 종사하신 분이었고 폭력을 자주 쓰시는 분이었단 얘기를, 이미 이전에 들었던 터라, 어느 정도 이해는 하던 참이었지만, 당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 얘길 처음 들었을 때와 더 험한 짓을 저 친구가 해내는 것을 본 때의 시간 차이가 3년 정도 흘렀단 점입니다.

처음 약한 남학생을 때리는 걸 본 계절이 봄이었고, 같은 반 여학생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계절이 봄이나 가을일겁니다. 여학생의 옷이 긴바지였으니까요. 더 어릴 때는 작고 약한 남학생들을 때리더니 나이가 차고 나서는 성범죄까지 저지르는 갑질의 다양성을 획득한 친구, 그러나 여전히 모두, 자신보다 약한 누군가를 향한 일들이었습니다.

3년이 조금 못되는 시간 속에서 많은 선생님께서 하면 되는 일과 안되는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커진 몸과 더 세진 힘이, 더 나쁜 짓을 하게끔 해줬습니다. 더 커진 몸과 세진 힘, 그것이 폭력의 재료가 된다는 것을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해가 됩니다.

그 친구는 아마도 선택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보고 배울 수 있는 대상을 아버지로 정해놓은 그 선택이 틀렸던 겁니다. 어머니를 선택했다면 달랐겠지요.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됐습니다. 그 남학생은, 힘이 센 다른 남학생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판단조차, 어머니에게 폭력적이고 여성을 멸시하는 습성을 보여준 그 친구의 아버지의 모습을 닮겠다는 본인의 선택에서 나온 것이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 친구가 어려서 받은 선택지에는, 얻어맞지만 착한 피해자인 어머니와, 때리고 욕하고 멸시하지만 가해자인 아버지, 둘 뿐이었는데 피해자라는 선택지를 고르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으므로, 그다지 비난할 수 있는 상황만은 아니었으리라, 널리 이해를 해봅니다.

폭력의 본질에 대해서 써보려고 노력했지만 닥치고 나니, 폭력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삭제의 대상이라는 결론에 가 닿게 됩니다. 폭력을 이해하는 시간에, 폭력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 관심과 집중을 하는 선택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 듭니다. “야 니가 말야~! 말을 똑바로 했어야지~! 야!!!!” 라며 주차장 안내하는 아주 어린 남자직원에게 운전석에서 반말을 고성으로 바로 제 옆에서 하시던 분이, 지금은 법조인의 자리에서 정의를 얘기하고 계신 세상인데, 이해보다는 대처가 시급한 사안 아니겠습니까. 그 모습을 본 뒤로 십수 년을 저는, 그 선배는 아마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본인이 그동안 같은 남성들의 집단 안에서 받은 멸시를 해소하지 못했던 걸까, 하는 등의 여러 방면의 이해의 노력을 했습니다만, 여전히 제 기억창고에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폭력을 이해하는 길은 너무 지루하고, 또 답이 온전히 다 보이지 않아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안계셔서 슬픈 본인 자신에게는 연민을 느끼지만, 아마도 힘센 아버지가 안계셔서 그 더운 날 주차안내를 해야 하는 청년에게는 연민이 없을 수 있다는 부조화를 무슨 수로 이해해야 할까요.

욕먹고 얻어맞는 어머니를 보고 컸지만 여자급우에게 그 어린나이에 성범죄수준까지의 행동을 보여주던 어린 시절의 그 친구가 그대로 겹쳐 떠올랐습니다. 폭력을 답습하는 유전자, 그 특별한 선택을 계속 해내는 유전자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평범한 사람은 폭력을 보면 그것을 삭제하는 선택을 했을텐데요.

자신이 가진 알량한 힘, 그 힘이 발휘될 수 있는 상대를 찾아서, 기어이 약점을 찾아 공격하면서 우위를 점하므로 인해 얻는 안정, 자신이 더 강하다는 인정 등을 얻기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이해를 해봤습니다만 이해가 피해자를 미리 살려놓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어떤 분들께서,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폭력을 훌륭하게 저지르고 계시는지, 기사들을 찬찬히 읽어보니, 다양하더군요. 아버지뻘, 아니 할아버지뻘 경비원에게 반말하고 침뱉는 분, 자신이 가진 언론인의 힘을 이용해 협박과 인격모독, 명예훼손까지 시시각각 즐기며 해내시는 분, 직장내 지위를 이용해 부당한 업무지시와 성범죄를 저질러 피해자로 하여금 자살하게 하신 분, 다양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폭력이라는 지적을 받으면 사과하고 멈추기 바쁜데, 저런 분들은 지속적으로 오히려 더 강화된 모습의 폭력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유전자가 특별하신 분들이에요. 이해의 측면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분들이시지요.

폭력에 대한 정의를, 매일같이 새로 내리고, 의견을 교환하고 시정하며, 다듬어나가는 질긴 노력이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폭력을 스스로 끊지 못하는 종자들을 걸러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모두가, 폭력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늙을 것이고 모두에게 어린 후손이 있을 것이며, 가난한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켜야 할 약자들이 있고 스스로가 약자가 됩니다, 바로 이런 약한 면모를 알아본 천한 종자들이, 폭력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 “더 강화된 양상을 통해” 생산해냅니다.

그리고 이 폭력을 당하고 나서, 그 피해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 중에, 오히려 모방을 하면서 피해자의 지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개체들도 생길테니, 이놈의 폭력은 심지어 전염력까지 있습니다. 남의 아파트에서 일어난 폭력, 그것은 남의 아파트의 일이 아닙니다. 갑과 을로 나누어서 상대를 짓밟겠다는 태도, 그것은 폭력의 인정과 응용입니다. 폭력이 갇혀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애초부터 범죄는 자유자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남의 아파트가 아니라 바로 내가 사는 이 세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시간이라는 물리적 속성위에서 약자가 되어가는 이 선명하고 선득한 세상. 어떻게 대비하고 정비해나가시겠습니까.

당신 옆의 폭력을 저지르는 천한 종자를 언제 솎아내실 겁니까.

오늘 당장, 바로 그 잡초를 뽑아내십시오. 가족, 친구, 동료, 지인, 그 어떤 이름의 인연이든, 그 잡초를 뽑아내셔야 살아남아 마땅한 것들이 숨을 쉴 수 있습니다. 폭력이라는 속성을 가졌으나 그 이름이 부모형제, 선생, 상사, 동료라면 그것은 전부 가짜, 쭉정이입니다. 기다리지 마십시오. 오늘이 그들을 뽑아낼 때입니다.

그야말로 천한 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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