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으러 갔다.

'수박여'(誰縛汝)라는 이름 앞에서 우두커니 섰다. 푸른 솔과 젊은 청춘들이 잘 어울리는 교정이다. 거기에 '수박여'라는 식당이라니. '누가 너를 묶었느냐'. 허기진 속을 달래러 간 터라 일단은 나를 묶어 놓은 식욕을 풀어야 했다. 밥을 먹으면서 내내 나를 묶은 것은 누구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수박여'는 절대적인 자유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는 말이란다. 우리의 마음이 온갖 생각으로 속박되어 있으면 번외망상의 삶이되고, 마음의 구속을 풀면 그게 바로 해탈이라는 의미로 지은 식당 이름, 수박여.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다. 밝은 목소리가 기대를 갖게 했다. 그녀는 한 때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사이다. 채무로 갑과 을의 관계가 되자마자 그녀는 퇴사를 했고 사실상갑과 을이 바뀐 채로 6년이 지났다. 앉아서 빌려주고 서서 받는다는 말에 한마디 더 보탠다. 서서라도 받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까치발로라도 서 있겠노라고. 전화를 해도 잘 안 받고 어쩌다 전화를 받으면 이러저러한 변명에 가슴이 답답했다. 잊어버리고 살기엔 벅찬 금액이다. 이자를 내는 날이나, 수중에 돈이 없어 쩔쩔 맬 때는 순간순간 온통 마음을 묶어 놓는다. 거절할 수 없는 표정으로 간곡하게 부탁하던 그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대출 받아 빌려준 피 같은 돈이다. 때때로 생각해 본다. 그녀는 과연 그 돈을 갚을 생각이 있는 걸까? 몇 년 새 돈을 빌려 갈 때보다 사회적 조건이나 생활은 나아진 듯 보였다. 자동차가 소형차에서 대형차로 바뀌었고 직위도 제법 올라갔다.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조금만 더 잘되어서 내 돈 좀 갚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기도가 무색하게도 어느 날 그녀가 성형수술로 탱탱하게 부은 눈을 제대로 다 뜨지도 못하고 나타났다. 눈 쌍꺼풀이 아직 없었다나?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변명은 여전했다. 칼자루는 이미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다시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절대로 돈을 꾸어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가우연히 전화를 했고 기꺼이 약속을 잡아 만나자는 말에 헐레벌떡 달려왔건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다는 말에 힘이 빠졌다. 밝은 목소리는 뭐란 말인가.

제법 열심히 사는 그녀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어느 선에서 늘 멈추는 이유가 스스로 묶어 놓은 매듭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도 어려워서 죽을 것 같다며 모든 체면 다 버리고 애걸 하듯이 돈을 빌려갈 때의 마음이 없어진 것이다. 이자가 늘어나는 은행돈도 아니고 재산에 압류 넣을만한 위인도 아닌 것 같아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변심을 한 것이 분명하다. '고름이 살 되는 법 없다'는 말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터. 그녀를 위해 충고의 말을 건넸다. 자신에게 스스로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묶어 놓지 말라고.

새무얼 스마일즈의 '자조론'을 밑줄 그어가며 읽었다. '속이 텅 빈 자루는 똑바로 서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빚이 있는 사람은 정직하게 살기 어렵다. 그래서 거짓말은 빚쟁이의 등에 업혀 다닌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빚을 진 채 아침에 일어나는 것보다 저녁을 굶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더 낫다'.

책을 덮으며 다시 기도한다. 그녀가 스스로를 실패한 사람이라고 묶어 놓지 않기를. 마음의 구속을 풀어 목소리만큼이나 밝은 자존감을 되찾기를 바란다. 거친 음식 먹으며 아끼고 분주하게 일한 대가로 대출도 갚고 몸도 좋아졌다. 못 받은 돈 때문에 애면글면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 일상이 묶이지 않은 채 술술 풀려나가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어쩌면 나는 그 돈을 이미 다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얼굴에 심술주름이 없어 성형수술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유인순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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