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포럼>이상주·극동대 외래교수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심상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필자는 고향 도촌리 앞산의 형상을 활모양이라 느꼈다. 1980년 여름, 친구 조흥기가 우리 집엘 왔다.

그날 밤 앞산을 바라보며 담소하다가, 앞산의 형상에 대한 나의 소감을 말했다. 그러자 그는 &amp;amp;amp;amp;quot;자네는 무인적인 기질이 있어 그렇게 보이는 거야. 내가 보기엔 가슴이 풍만한 여인이 무릎을 세우고 있는 형상으로 보이네. 저 왼쪽이 얼굴과 목 그리고 가슴, 그 다음은 무릎을 세운 형상이잖아.&amp;amp;amp;amp;quot;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언뜻 보아도 정말 그렇게도 보인다. &amp;amp;amp;amp;quot;자네는 낭만적 기질이 넘치는 사나이야. 그래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보이는군.&amp;amp;amp;amp;quot;이라고 응대했다. 그 친구는 왼쪽을 포괄하여 약간 더 넓은 범위의 형상까지 본 것이다.

그후 2005년 경, 딸 혜라에게 앞산의 모습이 어떤 모양으로 보이느냐고 물었다. 사람의 윗입술처럼 생겼다고 답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앞산의 형상은 쌍봉낙타의 잔등 모양으로 보아도 된다.

세 사람이 본 모습이 모두 다 맞다. 이렇듯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자신의 심상과 견문 그리고 보는 범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점은 산수평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괴산군의 '쌍계(雙溪)'에 대해 조유수는 1707년에 미인으로, 심제현은 가인으로 보았다. 정재응(鄭在應)은'우차송강선조운(又次松江先祖韻)' 3수 중 제1수에서 &amp;amp;amp;amp;quot;신선 세계에 자리잡았으니 속인들이 어찌 찾아오리? &amp;amp;amp;amp;quot;라 했다.

그의 선조인 송강이 쌍계에 살고싶어했다. 송강 다음시대 그의 선조인 정호(鄭澔)는 우암의 제자이다. 정재응은 주자와 우암을 숭상했으며 1811년 경 쌍계구곡을 설정했다.

'근차주선생도가운(謹次朱先生櫂歌韻)' 10수 중 제 9수에 &amp;amp;amp;amp;quot;남은 생애 홀로 '춘추전(春秋傳)'을 안고 있는데, 땅은 파계(巴溪)와 인접하고 있으니 소(小)화양구곡일세&amp;amp;amp;amp;quot;라 예찬했다. '파계'는 화양구곡의 제 9곡 '파곶(巴串)'의 이칭으로, 화양구곡 전체를 대변하는 말이다.

쌍계구곡의 설정은 그의 쌍계 산수에 대한 애호심과, 주자&amp;amp;amp;amp;middot; 율곡&amp;amp;amp;amp;middot; 우암의 학문적 계승에 대한 자연에의 표상화다. 이렇게 해서 쌍계는 자연산수에서 구곡(九曲)이라는 성리학적 산수로 새롭게 태어나 동양의 2대 산수문화의 하나인 구곡이 됐으며 문화산수로 한 점을 차지하게 됐다.

분명한 것은 비록 표현은 다르지만 조유수&amp;amp;amp;amp;middot;심제현&amp;amp;amp;amp;middot;정재응이 쌍계의 산수를 절경으로 평가한 점이다. 본질이 우수하면 표현을 달라도 그 진면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는 자신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가꾸어야한다. 잡석도 절차탁마하면 반들반들 윤이 난다.

한편 학문적 자세를 구비한 사람이라면 필자의 고향 앞산을 보는 식으로 관점은 다르더라도 타당한 이론과 타당한 논리체계에 의한 타당한 결론을 도출해야한다.

사람들 중에는 오기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비합리적인데도 불구하고 억지와 독단을 부리는 경우도 있고, 합리적인 상대의 견해도 묵살도외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하면 '왕자병'환자나 우물 안 개구리로 비판받는다. 객관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을 해야한다. 그러면 자신의 인품이 고상하고 우아하게 된다. 또 자신의 학문은 고도로 정치(精緻)하게 된다.

이상주&amp;amp;amp;amp;middot;극동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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