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전화 했다. 서로 사는 일이 바빠서 안부조차 묻지 못하고 지내는 형제들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위안 삼아 그저 무탈하게 지내려니 미루어 짐작하는 것만으로 알량한 형제애를 유지하고 산다. 친정아버지 제사나 명절 때에 잠깐 스치듯 보는 것만으로 동생들이 가진 삶의 무게를 가늠해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큰언니 노릇을 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이혼 후 더 어려워진 둘째가 일박이일 친정엄마와의 나들이를 제안한다. 선뜻 약속하지 못하고 사무실에 돌아와 일정표를 보고야 마지못해 몇 가지 일상을 앞뒤로 몰려 놓고 승낙을 했다. 잠을 줄여가며 일을 해도 밀린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받아놓은 날이 다가오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둘째는 밤늦게 식당일을 끝내고 경기도 구리에서 출발했고, 북면에 사는 셋째는 시할아버지 제사 끝내고 나와 함께 친정으로 갔다. 막내딸이 먼저 와서 엄마를 돕고 있었다. 자정이 다된 시간에 친정에 모인 딸들은 첫 새벽에 떠날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낮에 엄마가 준비한 감자를 찌고 옥수수를 삶고 복숭아를 씻어 팩에 담았다. 모두 맛있게 하나씩 나누어 먹어보다가 엄마의 달력을 보았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밋밋하고 커다란 달력에 15일 16일은 검은 매직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서툰 글씨로 '러너간다'라고 쓰여 있다. 아직도 한글을 다 알지 못하는 친정엄마가 '놀러 가는' 날을 기다리며 내내 확인했을 일정이다. 네 딸을 시집보낸 후 처음으로 딸들과 함께 가는 여행에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하고 계셨는지 달력을 보고 나서 뭉클했다. 핑크색 꽃무늬가 있는 새로 산 엄마의 수영복을 흔들어보며 다들 까르르 웃었다. '일흔일곱에도 저렇게 아이처럼 들뜰 수가 있구나!' 엄마가 건강하셔서 너무도 감사했다.

새벽 네 시 반에 조치원에서 출발하여 거제에 도착하니 여덟 시 반. 다섯 명이 차 안에서 먹고, 웃고, 휴게소에 내려 바람 쐬고 보니 단숨에 달려간 듯 거뜬했다. 구조라 선착장에서 아침을 먹고 배타고 나가 해금강, 외도를 돌아보고, 바닷가 아름다운 펜션에 여장을 풀었다. 바닷가에서 수영복을 입고 딸들과 포즈를 취한 엄마의 뽀얗고 통통한 허벅지를 보니 아버지를 여읜 지 이십여 년간 홀로 계시며 고독했을 엄마를 위로해주지 못한 세월이 마음에 걸렸다. 일찍 서두른 덕에 하루가 길었다. 선장네 집이라고 소개한 '막 썰어 횟집'에서 다섯 명의 여자가 연거푸 건배를 외쳐가며 술을 마시고 근처 노래방으로 향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흥겹게 노래 부르는 친정엄마 옆에서 백댄서를 하며 각자의 삶에서 얽혀 있던 매듭을 녹였다. 누구도 서로의 삶을 지적하지 않았다. 동생들을 나 몰라라 하고 저만 살겠다고 바쁜 내게도 한마디씩 덕담을 해준다. '큰언니 열심히 살아주어서 고마워'

이혼을 자신의 오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둘째에도 잘못된 판단이라고 비난을 하지 않았다. 칠 남매 중 가장 어렵게 자란 둘째다. 언니, 오빠 기성회비 내고 나야 본인이 학교에 기성회비를 가져갔다며 알지도 못하는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 새 옷 한번 입지 못했다는 얘기에 엄마가 미안하다며 동의하신다. '그래도 넌 착하니까 좋은 인연 다시 만날 거야'

곁에 있으면 가슴에서 '딸칵딸칵' 시계 소리가 나는 셋째 딸은 여전히 예쁘다. 심장 판막증 수술 후 공기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시골로 시집간 셋째다. 선본 지 한 달 만에 결혼했지만 착한 배우자를 만나 마음고생 안 하고 잘살고 있다. 평생을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고 사는데 작년에 몹시 아프고 나더니 죽음에 대한 생각을 누구보다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시골에서는 입을 수 없는 짧은 바지에 늘씬한 각선미가 눈길을 끈다. '그래 입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입어봐, 마흔 중반에 너처럼 예쁜 다리를 가진 사람은 드물지'

신혼 초부터 엉터리 제부 때문에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고생하는 막내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아직도 네 남편이 그리 좋으냐.'라는 말에 주저 없이 대답한다. '천생연분인 것 같다'라고. 부부 사이를 누가 알 수 있으랴.

밤 깊도록 포도주를 마셔가며 친정엄마랑 네 딸은 처음으로 한 핏줄로 만난 인연에 감사했다. 월폴욕조에 꽃잎을 띄우고 우르르 들어갔다. 물이 넘치고 맨살들이 닿았다. 아직도 뽀얀 엄마의 젖가슴을 희롱했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얼른 눈동자의 물기를 가렸다. 웃어도 눈물이 난다. 금쪽같은 내 동기간들.



/유인순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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