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7~8일 이틀에 걸쳐 생애 최초로 지리산을 종주했다. 한반도의 지붕 지리산은 남한에서 가장 높고(1,915m), 면적으로도 20개 국립공원 중 가장 크다(483.022㎢).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의 3대 주봉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20여개의 봉우리, 그리고 20여개의 긴 능선과 칠선계곡, 한신계곡, 대원사계곡, 피아골, 뱀사골 등 수많은 계곡들. 북으로는 만수천-임천-엄천강-경호강-남강-낙동강이 이어지고, 남으로는 섬진강이 흐르며, 전남·전북·경남 3개 도에 걸쳐 있는 지리산. 수많은 동·식물과 다양한 문화권으로 곳곳에 이야기 거리·볼거리가 쌓여 있다. 그래서 산을 찾는 이들에게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25.5km의 지리산 종주는 하나의 로망이다.

지난해부터 전국 100명산을 5년 내에 다녀보는 것을 소박한 목표로 삼고 한 달에 두어 번 주말마다 다니고 있는데, 올해 꼭 가보고 싶은 산이 지리산이었다. 그런데 멀고, 험하고, 하루에는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가, 평소 같이 산에 다니는 대학동기들의 도움으로 가게 되었다. 천우신조로 산장을 예약, 산행 하루 전 밤중에 내려가 콘도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7시에 삼성재를 출발해 열 시간 동안 22.3km를 걸어 해질 무렵 세석산장에 도착했다. 걸으면서 말로만 듣던 노루목이며, 임걸령, 반야봉, 피아골 등을 만나는 기쁨은 간접체험과 직접체험의 차이를 만끽하게 했다. 지금껏 당일치기 산행 밖에 해보지 못해 옛날 군대 내무반처럼 마루에서 일렬로 누워 자는 산장에서 과연 잠이 올까 걱정되었지만, 8시에 취침하는 데도 잠이 잘 왔다. 새벽에 만난 지리산의 별들은 너무도 크고 맑고 가까워서 나를 놀라게 했다. 다음날도 7시에 출발해서 주봉인 천왕봉을 향해 나아갔다. 천왕봉을 향해 장터목을 지나 200여 미터 상승하는 길은 바위와 돌로 이루어진 험산이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산굽이 산굽이, 정말 돌아도 돌아도 산으로만 되어 있는 것 같은 한반도. 마지막 정상을 향하는 길목에서는 바로 손에 잡힐 듯 한데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고통이 사람을 괴롭힌다.

드디어 정상. 정상에는 밤새워 올라온 이들, 전날 낮에 올라와 가까운 장터목산장에서 자고 올라온 이들, 우리처럼 조금 먼 산장에서 자고 온 이들로 인산인해다. 모두들 즐거운 표정이다. 고통을 통해 이뤘다는 성취의 기쁨. 사실 그렇다. 이렇게 높고 먼 산을 올랐다는 것, 감히 '정복했다'는 말을 쓰기는 부끄럽고 단지 '만났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정상도달은, 성취감을 통해 작은 만족을 준다. 남도의 산 지리산에서 뻗어나간 산줄기들은 형언키 어려운 장대함과 웅혼함이 있어 한반도의 지붕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끝간 데 없는 하늘과 산, 거기 한없이 작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서 있는 나. 산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온통 바위와 돌투성이 길을 네 시간 걸려 중산리에 이르러 32.8km의 종주를 마쳤다. 섬진강을 끼고 달리는 찻길에서 바라보니, 과연 어떻게 저렇게 높고 큰 산을 다녀올 수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동행해준 친구들에게 감사했다.

삼십대 초부터 주말에는 늘 골프장에서 살았는데, 쉰 넘어 산에 눈이 뜨여 이제는 골프채에서 손을 조금씩 놓는다. 그리고 한 달에 두어 번 비교적 큰 산에 간다. 동네산도 한 주에 한 두 번 간다. 먼 산에 가지 않는 주말이나 주일에는 낙가산이나 상당산성, 부모산, 양성산, 미동산 등을 찾는다. 모두 한두 시간이면 걸을 수 있는 산길이다. 길에서 자연과 만난다. 길에서 계절과 만난다. 길에서 자신과 만난다. 그래서 산을 찾는다. 작은 산은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 큰 산은 성취감과 자부심, 그리고 자연과 창조주에 대한 경외감을 준다. 이 얼마나 좋은가. 몸의 건강은 생각하지 않아도 따라 오는 것, 별도로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다. 튼튼한 육신과 하고자 하는 의욕만 있으면 할 수 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관대해진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만산홍엽의 계절에 한 번 나서 보시지 않겠는가, 우리를 부르고 있는 저기 저 산을 향해.



/유재풍 법무법인 청주로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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