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는 잘 나갔어, 여기 떠나길 잘 한거라고. 산에서 나무나 해다 때던 사람이 지금은 대학에서 대학생들 가르친다며?'

명절이나 시제 때에나 겨우 만날 수 있는 살가운 동기간들이다. 은행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날 때마다 꽃비처럼 노랑 잎이 사선으로 나풀거리며 우리들 어깨위에 내려앉는다. 황룡사 납골당에 분골을 모셔놓고 처음으로 지내는 시제다. 해마다 시제 때에 유사는 음식을 마련하고, 산에서 어설프게 음식 차려내느라 번잡스러웠다. 행정수도로 종중산이 수용되어 조상을 절에 모셔놓고 나니 음식 장만의 노역에서 벗어난 아낙들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한가로이 인사를 나눈다.

내가 시집와서 우리 형님들을 만났을 때 모두들 꽃다운 나이였다. 나보다 열 살 위인 먼 친척 형님은 멀리서도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다. 함께 들에 일하러 나갈 때마다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 흙을 만져도 되는가 싶었다. 팔순이 넘어 기우뚱 기우뚱 걷는 형님도 그때는 팔팔했었다. 더 늙기 전에 동서들 함께 모여 여행이나 하자는 말에 옛 이야기를 꺼낸다. 농사짓는 일이 전부였던 그 시절에 허리가 휠 것 같은 농번기가 지나면 시 어른들 허락을 받고 동서들이 함께 나들이를 했었다. 사촌, 육촌, 팔촌까지 모여서 부산도 다녀오고 목포도 다녀오고 여수도 다녀왔다. 포대기로 아이 들쳐 업고 찬합에 꾹꾹 눌러 싼 밥보자기 들고, 야간열차타고 버스 갈아타가며 다녔지만 불편한 줄 모르고 무엇이 좋은지 연신 깔깔거리며 구경 다녔던 기억이 있다. 삼십년 도 더 되는 날들의 이야기를 하느라 모두들 한 번씩 말참견을 한다.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어도 그때가 좋았지. 지금은 집집마다 자가용도 있고 경제적 여유도 있고 특별히 농사일이 더 바쁜 것도 아닌데 틈을 못 내겠다' 며 속절없이 늙어만 가고 있는 게 안타깝다는 얘기 끝에, 뛰노는 손녀딸에게 눈을 두고 있는 내 얘기가 나왔다.

철없던 시절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서둘러 도망치듯 결혼했다가 일속에 파묻혀 우울하게 살았던 날들이 떠오른다. 뼈가 녹을 것 같은 농사일이 거의 끝난 이즈음 이면 '땔나무꾼'이 되었다. 타작한 콩다발, 들깨다발, 볏짚 등 을 갈무리 해 놓아야 한겨울 땔감으로 쓸 수 있었다. 인근 야산 비탈에서 갈퀴로 솔가리를 긁어 지게질로 하루 두어 번씩 산을 오갔던 일이 새삼스럽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날은 왜낫을 들고 청솔가지를 한 지게씩 해다 아궁이에 넣으면 매캐한 연기가 부엌에 가득 찼었다. 불이 잘 붙지 않는 대신 오래 타기 때문에 방구들 덥히는 데는 청솔가지만한 땔감이 없었다. 방앗간에서 도정을 하고 왕겨를 포대에 담아와 풀무로 불을 때다가 머리칼을 태웠던 일들이 흑백사진처럼 떠오른다. 그곳에서 평생을 땔나무꾼처럼 농부로 살 것 같았던 나는 남편 직장 따라 천안으로 나오면서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더 이상 시집살이도 없고 지겨운 농사일도 없어 오히려 허망해진 날들이 낯설었었다.

남의 옷을 걸쳐 입은 듯 겉돌던 내가 늦게 공부를 시작하면서 천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형님 말대로 '산에서 나무나 하던 사람'이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편 아찔하기도 한 날들이다. 내 인생 곳곳에서 선택해야 했던 수많은 길들, '사다리타기' 같은 선택들이었다. 어찌 혼자서 이 길을 왔겠는가. 땅이나 파던 아낙에게 이정표가 되어주신 많은 분들이 떠오른다. 팔십 중반의 나이에도 곧은 자세로 서서 도착하는 이들의 인사를 받고 계신 시아주버님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시다. 지금도 좋은 자료가 있으면 이메일로 보내주시고 만나면 언제나 칭찬과 격려와 지지로 내 길을 열어 주었다. 친정아버지 같은 시숙어른이시다. 시간이 되자 황룡사 마당에 친척들이 그들먹하게 모였다.


또 한 차례 나비처럼 은행잎이 팔랑거리며 손등에 내려앉는다. 색이 참 곱다. 우리 형님들 젊은 시절 피부처럼 매끄러운 감촉이다. 까르르르 웃음소리를 날리며 통통 뛰어다니는 손녀딸에게 은행잎 한줌 흩뿌려준다. 축복이다. 내 인생길은.



/유인순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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