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지만 근무를 하는 날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푸근한 토요일 오후이다. 다른 날은 퇴근할 때부터 컴컴한데 오늘은 해가 중천에 있으니 마음이 넉넉하다. 엊저녁에 읽던 책을 펼치고 몇 장 읽자니 언제 그려놓았는지 가을 산 삽화가 아른거린다. 은행잎 책갈피가 가을 산에 가자고 유혹한다. 봄처녀처럼 마음이 설레어져 단풍이 손짓하는 우암산으로 향하니 은행잎이 노란 나비 떼가 되어 동행하여 주어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산기슭 오솔길에 들어서니 산기슭의 억새가 흰꽃이 되어 한들한들 춤추며 반겨주고, 가랑잎들이 산새들처럼 포르르- 포르르- 머리 위로 고추잠자리처럼 날아다닌다. 간밤에 내린 가을비로 서둘러 내려왔는지 성미 급한 낙엽은 어느새 폭신한 양탄자를 길마다 산마다 골고루 발그스름하게 깔아놓았다. 대자연의 위대한 힘이 아니고는 꿈도 꾸기 어려운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이다. 여름내 내린 폭우와 사람들의 발길에 패여 앙상하게 드러낸 뿌리가 안타까워서 덮어주는지 눈보라치는 삭풍에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주려고 포근한 엄마 품처럼 감싸주고 있다. 또한 한 해 두 해 지나면 온몸을 바쳐 거름까지 되어 초목들이 자랄 수 있게 하는 낙엽 또한 위대하다. 마치 제 몸을 녹여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 같은 숭고하고 엄숙한 낙엽이기도 하다.

오솔길마다 바스락거리는 가랑잎들은 도토리와 열매들을 숨겨두었다가 다람쥐 등의 겨울 양식이 되게 하는데 금년에는 도토리도 무척 귀하다고 한다. 산짐승들이 춥고 긴 겨울을 어떻게 이길까 걱정도 된다. 또한 도심까지 내려와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하는 멧돼지가 올 겨울에는 더 극성을 부리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몇 십 년 전만까지만 해도 땔나무가 모자라 가랑잎과 솔잎들까지 긁어서 땔감으로 썼던 때를 생각하면 옛날이야기만 같고 안타깝기도 하다. 지금은 간벌한 나무들까지 여기저기서 그냥 썩어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마저 든다.

어느덧 나목(裸木)이 되어가는 가을 산을 보니 우리네 인생도 나무와 많이도 닮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듯 쉼 없이 변주(變奏)되는 우리의 삶들이 있다. 때로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이지만, 어느 책에서는 20살까지는 봄, 40살까지는 여름, 60살까지는 가을, 그 후는 겨울이라는 인생 사계(四季)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계절인가 대입하여 보면 시간의 소중함을 거듭 느끼고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마음에 수많은 집을 짓고, 방을 다 채우기도 전에 허물고, 때로는 모래 위에 화려한 성을 쌓고 화려한 자아도취감에 빠지기도 하지나 않았는지? 크고 작은 세상사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초지일관으로 중심을 단단히 잡고 소걸음처럼 우직하게 걸어나가야 하는데...... .

우리 학생들도 가을철과 다가오는 학년말을 맞아 더욱 창의성과 인성을 기르며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유레카(eureka)! 유레카!'를 외친 것처럼 앎의 기쁨과 감격을 많이 체험하고 더욱 일취월장하기를 바란다.

가을엔 수확의 기쁨처럼 푸근하고 넉넉해지고, 아름다운 단풍이 산하를 수놓듯 우리 인생 또한 열심히 농사지었다면 많든 적든 거둬들인 곳간의 양식에 만족할 줄도 알아야 하고, 겨울엔 마음을 비울 줄도 알고, 여름의 푸르렀던 신록과 가을의 아름답던 단풍을 내려놓고 앙상한 가지로 서있는 저 나무처럼 욕심을 줄이고 초연하게 살아가라고 가을 산이 속삭여주고 있다.



/김진웅 경덕초등학교 교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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