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갑자기 매서워졌다. 종종걸음으로 주차장을 가로질러 차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바람을 피했다. 밤 새 더워진 몸이 불과 몇 발자국 옮기는 사이에 차갑게 얼어왔다. 몇 몇 남은 잎사귀가 가지 채 흔드는 바람에 부러지듯 '툭' 떨어졌다. 아이들이 눈만 내 놓은 채 온통 감싸고 학교 길을 향하고 있다. 어떤 아이가 손목이 드러나는 점퍼 차림으로 종종종 뛰어간다. 지난여름 훌쩍 큰 아이의 입동 준비가 아직 덜 되었나보다. 그러고 보니 유치원에 다니는 손녀딸의 코트가 쓸 만한지 걱정이 되었다. 커가는 때에 맞추어서 척 척 사주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과 견주다보니 한 해는 크게 입히고 한 해는 작게 입힌다. 적당한 가난은 삶에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여 일터로 나선다. 핑크색을 좋아하는 손녀딸에게 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핑크 점퍼를 사주는 모습을 상상하며.

노력하는 나날의 삶속에 행복이 있다고 플라톤은 말했다. 그 행복의 조건으로는 재산, 용모, 명예, 체력, 말솜씨 등이 있는데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용모.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겨루어서 한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 정도에게 질 정도의 체력.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 이 다섯 가지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한 플라톤을 이제야 만났다.

플라톤에 의하면 내가 딱 행복한 사람이다. 매일 먹는 점심값이 부담스러워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휴게주방에 들여놓은 냉장고에는 각자의 솜씨로 장만한 밑반찬 들이 있고 국이나 찌개는 집에서 끓여와 전자레인지에 덥혀먹는다. 갓 지은 더운밥을 먹고 싶어서 점심시간이면 오히려 사무실로 들어오기도 한다. 어떤 때는 몇몇 교육생들과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늦게 공부하며 느끼는 애로를 수다로 풀기도 한다. 후식으로 차 한 잔 하고나면 좀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는 것도'밥상머리에서 정이 난다'라는 말 때문인 듯하다. 매일 지출되는 점심값이 부담스러워 시작한 '밥상'에서 친교와 우정을 다시 확인한다. 직원들이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다.

나이가 들면서 주변에 성형수술로 얼굴이 묘해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 큰 돈 들여 '공사'를 했는데도 칭찬을 하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푹 파인 눈꺼풀, 억지로 잡아당겨진 얼굴에 표정이 복잡하다. 가끔씩 '요즘 피곤하세요?'라고 묻는 이들에게 꺼칠해지고 주름지기 시작한 내 얼굴을 들키지만 아직은 화장으로 부족한 부분을 추스르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누구에게인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 날, 그날은 수없이 거울을 보며 행복해 한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내 기를 살려 주는가.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용모'가 때때로 그렇게 행복감을 선물한다.

'동사무소 난동 시의원' 얘기가 한참을 떠돌았다. 자기 이름을 알아주지 않았다고 난동을 부렸다는 그 시의원은 비난을 면치 못하고 징계로 제명을 당해 의원직을 잃게 되었다.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를 갖는 것이 행복이라는 플라톤의 얘기를 알았더라면 그 시의원은 오히려 동사무소 직원의 응대에 자신의 입지를 좀 더 알리려고 노력 하여 시민에게 친절하고 훌륭한 시의원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인의 출판 기념회에 가서 저자 사인을 받으려고 명함을 내어 놓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친필사인을 해주느라 지쳐있을 작가에게 내 이름을 기억해내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함이다. 친한 사람 이름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 난감했던 기억도 있고 철자를 틀리게 써서 피차 민망한 일을 피하고자 함이다. 아직 박사학위를 받지 못한 내게 '유인순 박사님'이라는 덕담으로 "벌써 그렇게 되었으니 고맙다."는 뜻을 전해 주시니 '사람들이 나를 다 알아보지 않을 정도의 명예'가 오히려 행복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내가 갖고 있는 소소한 조건들이 불만이었는데 플라톤을 통해 부족함을 메우려는 노력이 내 삶을 행복하게 한다는 진리를 깨닫고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공자의 말씀을 떠올린다. '배우고 또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행복을 갖고 있으면서도 배우지 아니하여 행복인줄 몰랐는데 플라톤으로부터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행복한 일이다.



/유인순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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