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회담 3일째인 4일 남북 정상이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선언'에 서명하는 것으로 클라이맥스를 맞았다.

이번 회담은 대한민국 역사상 대통령의 첫 육로 방북과 군사분계선(mdl) 도보 월경 등 분단 민족사에 기억될 상징적인 장면들을 남겼을 뿐아니라 제2의 '6.15 공동선언'을 도출해냄으로써 남북이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주도적으로 협력하고 경제협력을 통해 공동번영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2박3일 평양행'을 추진하면서부터 '2007 남북정상선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본다.

◇ 평양 도착부터 선언 채택까지 = 노 대통령은 방북 첫날인 2일 낮 12시께 평양 시내 4.25 문화회관 광장에 도착,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직접 영접을 받았다. 김 위원장이 두 차례나 노 대통령의 공식환영식 장소를 옮기면서 '영접'에 나옴으로써 두 정상은 첫 만남을 가졌다.

두 정상의 첫 만남은 다소 긴장된 분위기에서 시중일관 차분하게 이뤄져 일각에서는 이번 회담에 대한 우려섞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남북 정상은 첫날 공식환영 행사에서 12분간 만난 후 이튿날 아침부터 소수의 배석자만 참석하는 단독회담에서 머리를 맞댔다. 예정을 앞당겨 노 대통령의 숙소인백화원초대소에 도착한 김 위원장의 표정은 전날보다 밝았고 오전 9시34분께 시작된1차 회담에서 두 정상은 서로 간 신뢰를 확인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나눴다.

노 대통령은 오전 정상회담 후 평양 옥류관에서 남측대표단과 오찬을 함께한 자리에서 "오전에 (김정일 위원장과) 숨김없이 진솔하게 얘기를 나눴다"며 "분명하게 평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오찬 후 오후 2시45분께 속개된 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모두발언을 통해 "모레(5일) 아침에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며 '파격 제안'을 했다. 잠시 분위기가어색해졌으나 노 대통령은 "큰 일은 제가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결정하지 못한다. 경호.의전 쪽과 상의를 해봐야 하겠다"며 즉답을 피한 채 참모들과 상의해 결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계속된 회담에서 두 정상은 평화, 공동번영, 화해 및 통일에 관한 의제들을 심도있게 논의, 오후 4시25분께 '4일 낮 환송오찬 전까지 합의 사항을 선언 형식으로 발표한다'는 내용에 합의하고 회담을 마쳤다. 오전과 오후 두차례 회담 시간을통틀어 3시간51분 만이었다.

김 위원장은 회담 말미에 "충분히 대화를 나눴으니 (노 대통령의 방북을 연장) 안 해도 되겠다. 남측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본래대로 합시다"라며 언급,제안을 철회했다.

남북은 3일 저녁부터 두 정상의 합의사항을 공동 선언 형식에 담기 위한 막판 조문 조율작업을 밤새 벌였고, 4일 오후 1시께 두 정상은 드디어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라는 역사적인 문서에 서명했다.

◇회담 추진부터 평양까지 = 정부는 대선을 4개월여 앞둔 시점인 지난 8월 8일 정상회담 개최를 전격 발표했다.

이번 정상회담은 정부가 7월 초 북측에 정상회담을 위한 고위급 접촉을 제안한 데 이어 7월29일 북측의 김만복 국정원장 방북 초청 등 프로세스를 통해 '은밀하게'추진됐다.

김 원장은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한 기자회견에서 "북측의 초청으로 대통령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김 원장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8월 2∼3일에 이어 4∼5일 2차례에 걸쳐 비공개로 북한을 방문, 북측과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는 게 정부의 공식 발표다.

김 원장은 1차 방북에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으로부터 김정일 위원장의 위임에 따른 중대 제안 형식으로 '8월 하순 평양에서 수뇌상봉을 개최하자'는 제의를 받았고 2차 방북에서 노 대통령의 친서 전달과 함께 북측과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정상회담 개최발표 후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 정치권은 정상회담이 대선에 활용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일각에서는 정상회담을 차기 정권에 넘겨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정상회담을 열더라도 북핵문제 해결에 중점을 둬야한다는 요구도 끊이지 않았다.

특히 서해 북방한계선(nll) 재설정 문제가 정상회담 의제의 하나로 논의될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국민들 사이에 이념 갈등이 초래되는 양상을 보였고 정부 내에서도nll이 '안보 개념'이냐 '영토 개념'이냐를 두고 통일부와 국방부, 국정원 등이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는 등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아울러 이번 정상회담의 중요한 의제로 다뤄질 남북경협이 대규모 대북투자 합의로 이어질 경우 차기정권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런 지적에 대해 정부는 '경협을 통한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노 대통령은9월 초 "차기정권에 부담을 주는 합의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렇게 정상회담의 시기와 의제를 두고 공방전이 벌어지는 동안 남북 당국은 지난 8월14일 준비접촉과 분야별 실무접촉을 통해 경의선 도로를 이용한 노 대통령의 육로방북, 대표단 규모 등 대부분의 협의사항에 합의했다.

그러나 북한에 내린 집중 호우로 당초 8월 28일부터 열릴 예정이던 정상회담이 10월 2~4일로 한달 이상 연기됐다. 이를 두고 정상회담을 통해 대선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북한의 의도가 드러났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두차례 평양에 파견한 정상회담 준비 선발대는 노 대통령의 아리랑 공연 관람과군사분계선 도보 월경 등 마지막 미합의사항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했다.

이런 준비과정을 거쳐 노 대통령은 지난 2일 전용차량 편으로 청와대를 출발한 후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4시간여 만에 공식환영식이 열린 평양 4.25문화회관 광장에 도착했다.

bond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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