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의 재발견] 2. 간행의 시대적 배경

직지가 간행되었던 14세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정치적인 흐름은 원(元)나라의 정치적 간섭과 공민왕대(恭愍王代, 1351~1374)의 반원적 개혁정치(反元的改革政治)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변화는 불교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불교계는 이미 13세기 후반 이후에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원 지배라는 정치적 현실 속에 타협하고 온존하려는 경향과 13세기 전후의 신앙결사를 계승하면서 당시의 보수적인 성격을 비판하려는 경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같은 불교계의 보수적인 경향 속에서도 주목할 부분은 당시의 고려 불교계에서 묵조선(默照禪)보다는 간화선(看話禪)이 크게 유행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지공(指空)과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 나옹 혜근(懶翁惠懃, 1320~1376) 그리고 직지의 찬자(撰者)인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8~1374)의 활동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전시된 직지가 인쇄되는 과정을 연출한 모형 인형.ⓒ 이준현 기자
지공ㆍ나옹ㆍ백운 불교신앙 전파에 전념

무심사상(無心思想)을 통하여 순수 불교사상과 신앙을 전파하고자 노력하였던 지공과 나옹 그리고 백운은 물론 공민왕대의 개혁 정치에 많은 조언을 하며 선문구산(禪門九山)을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던 보우 등은 상당한 불교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직지'의 간행이 갖는 일차적인 의미는 여기에 있다. 바로 이 같은 선사상(禪思想)의 유행 속에서 순수한 불교사상과 신앙이 강조된 불교서(佛敎書)가 바로 '직지'였던 것이다.

한편 '직지'의 간행과 더불어 살펴볼 또 하나의 사실은 13세기 이래 추진되었던 불경(佛經)의 간행이다. 13세기 고려 불교계의 커다란 성과 가운데 하나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의 간행(刊行)이다. '대장경' 간행의 목적은 불력(佛力)에 힘입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대장경' 조성에는 무신란(武臣亂) 이후 고려 사회가 갖고 있던 내부의 모순을 대몽항쟁(對蒙抗戰)의 방향으로 돌리기 위한 최씨정권(崔氏政權)의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선사상(禪思想)과 관련된 책 간행은 이미 13세기부터 진행되어 왔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곧 1240~1250년대에 최씨정권의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많은 선적(禪籍)이 간행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선적들은 대부분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한 임제종(臨濟宗)과는 다른 선사상(禪思想)을 표방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의 선사상을 주도한 수선사(修禪社)가 간화선을 강조하는 임제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표방했지만, 불교계에서는 오히려 사상적으로 탄력과 포용성을 갖추어 다른 계통의 선사상에 대한 해석도 비판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흐름은 14세기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바로 중국의 임제선만을 고집하던 보우를 중심으로 고려 말의 선사상(禪思想)이 배타적(排他的)인 경향(傾向)을 가진 때문이었다. '직지'의 간행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여기에 있다.

選場참관이 백운의 위상을 가늠케

'직지'의 간행은 백운 경한의 불교적 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를 보여주는 사실이 1370년(공민왕 19)에 치러진 광명사(廣明寺)의 선장(選場)이었다. 이 시험에는 나옹(懶翁)이 주맹(主盟)이 되고, 당시의 국사(國師)였던 화엄종(華嚴宗)의 천희(千熙)를 포함하여 양종오교(兩宗五敎)의 많은 승려들이 참여하였는데 바로 이 자리에 백운도 참여하였다. 이것은 백운이 지녔던 불교계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민왕의 요청에 의해 1365년(공민왕 14) 신광사(神光寺)에 주석했던 사실을 본다면 이름난 고승(高僧)으로서 불교계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같은 점이 '직지'의 간행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계의 흐름 속에서 '직지'의 간행은 금속활자본과 목판본으로 인쇄되었다.

취암사판(鷲巖寺板)의 간행은 백운 선사가 '직지'를 편찬했던 1372년(공민왕 21)에서 입적했던 1374년(공민왕 23)을 즈음한 시기에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72년(공민왕 21)부터 회암사(會岩寺)에 지공선사의 부도비를 건립하고, 회암사의 중창을 꾸준히 추진하는 등 불교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고려한다면 지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나옹과 백운선사의 선사상이 새롭게 강조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라경준ㆍ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사
이와 같은 불교계의 새로운 움직임 속에 목판본 '직지'는 간행 중이었으므로, 청주 흥덕사에 보관된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1377년에 '직지'를 인쇄한 것으로 이해된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