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황수 또는 황규수… 후손 430명

시조 황수(黃粹)는 고려 고종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다. 그러나 전해오는 문헌이 없어 본관의 유래나 세계(世系)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관성황씨는 또 황규수(黃奎壽)를 시조로 전하기도 한다.

기해보(己亥譜) 서문에 따르면 고려 명종조(1171-1197) 때 황규수가 금자광록대부 중서문하성 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하고 관성군(管城君)에 올랐다.

그 뒤 후손들이 황규수를 기세조(起世祖)로 하고 관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 후 10세손 황계우(黃繼祐)가 조선 세종 때 공조참의를 거쳐 좌찬성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본관 관성(管城)은 옥천의 별호이다. 관성군(管城郡)은 현 옥천(沃川)으로 고시산(古尸山), 관성(管城), 옥주(沃州), 양산(陽山), 소리(所利), 안읍(安邑) 등으로 불리었다. 신라 때 당초 지명은 고시산군(古尸山郡)이었으나 경덕왕 때부터는 관성군(管城郡)으로 불렸다.

옥천은 고려 충선왕 때부터는 옥주(玉州)로 불렸다. 옥천은 또 조선 초에 충청도에 속하지 않았다. 옥천이 충청도에 속하게 된 것은 조선 태종 때였다. 이때 보은, 영동, 황간, 청산 등도 함께 충청도로 편입됐다.

그 뒤 조선 1413년(태종13) 옥천군으로 개칭됐다. 1896년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군이 됐고, 1914년 청산군이 옥천군에 통합됐다.

'옥주'가 '옥천'으로 바뀐 것은 각 지역의 거점도시를 의미하는 계수관제도(지금의 거점도시 성격)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충청도의 4대 계수관은 충주, 청주, 공주, 홍주 등으로 모두 '주' 자가 들어가 있고, 지금도 그 지명은 유지되고 있다.

옥천군 관내 지역의 주요 성씨로는 관성황씨(管城黃氏) 등 황(黃)씨 외에 옥천육씨(沃川陸氏) 등이 있었다.

옥천군(沃川郡)은 대전광역시의 생활권에 속하며 옥천읍, 군북면, 군서면, 동이면, 안남면, 안내면, 이원면, 청산면, 청성면 등 1개 읍 8개 면 216개 동리가 있다. 군청소재지는 옥천읍 삼양리이다.

관성황씨의 유일한 집성촌은 충북도 옥천군 옥천읍 귀화리이다. 황규수의 10대손인 황계우(黃繼祐)가 조선 세종 때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관성황씨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27대 손인 황대섭 포도작목반장 대까지 17대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약 580여 년 동안 한 마을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고향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늘면서 현재 관성황씨도 인구가 크게 줄었다.

한편 옥천읍 귀화리는 돌람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주민들에게 산책로와 좋은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돌람산은 나무보다도 돌이 많은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제는 옥천을 상징하는 명소가 됐다. 지금은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지만 40년 전만 해도 돌람산에는 진달래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을 뒷산에 진달래꽃이 자생하고 있다고 해 귀할귀(貴), 꽃화(花)를 사용하게 됐다는 얘기처럼 귀화리란 마을의 이름도 이 돌람산의 진달래꽃에서 유래됐다.

귀화리는 오늘날 옥천포도의 원류를 이루었던 마을이다. 돌람산 아래에서 약 60년 전부터 포도재배를 해 부농의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입을 바탕으로 귀화리는 최근'충북 최우수 마을'로 선정됐고 또 농촌진흥청의'잘 사는 마을'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관성황씨는 1985년에는 총 47가구 186명, 2000년에는 총 141가구 430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5년 만에 약 2.5배가량 인구가 늘었다. 2000년 현재 서울 126명, 부산 38명, 대구 8명, 인천 29명, 광주 9명, 대전 35명, 울산 6명, 경기 64명, 강원 8명, 충북 24명, 충남 25명, 전북 9명, 전남 11명, 경북 12명, 경남 26명, 제주 0명이다.

본관 옥천 지명이 있는 충북을 비롯 인근 지역인 대전, 충남에 많이 분포돼 있다. 그밖에 경남지역에도 일부 분포돼 있다.
▲ 정복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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