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설을 맞아 쌀 20Kg을 떡쌀로 담갔었다. 그리고 그것을 방앗간에 보내 흰떡가래를 뽑았다. 친정어머니는 손 크게 웬 흰떡을 이만큼 많이 만드느냐며 잔소리를 한다. 친정에 형제들이 명절 쇠러 오면 떡국이라도 끓여주고 얼마씩 싸 보내려고 흰떡을 많이 뽑았다고 하자 어머닌 " 요즘 입맛들이 고급이라 예전처럼 떡국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 라고 한다. 나도 젊었을 땐 떡국을 먹으면 속이 그들먹하고 소화가 잘 안 되는 듯 하여 한동안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한데 입맛도 나이 들면 예전으로 다시 되돌아 가나보다. 겨울철엔 뜨끈한 국물이 좋다. 그 중에 고명으로 잘게 부순 김 가루, 다진 소고기볶음, 달걀지단을 올리고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트린떡국 한 그릇은 새해 음식이기 전 겨울철 별미여서 입맛이 당긴다. 사골 육수나 매생이, 굴 등을 넣고 끓인 국물에 나붓나붓 얇게 썬 흰떡과 정성껏 빚은 만두가 들어간 떡국은 생각만 하여도 입안에 군침이 절로 돈다.

먹을게 지천인 요즘 겨울철만 돌아오면 떡국 맛이 간절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어린 날의 가슴 아픈 추억 때문이다. 그 당시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였지만 잦은 바람기 탓에 아버지의 가정 외면은 우리 집에 끼니를 이을 양식조차 없게 했었다. 그런 연유로 어려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설날에 맛있는 떡국을 실컷 먹는 일이었다. 멀건 흰죽, 국수로 끼니를 잇는 일이 다반사였던 그 시절 흰쌀밥도 아닌 떡국은 감히 먹어볼 엄두도 못 낼 음식임에 분명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어머니가 몇날며칠 밤새워 한복 바느질을 해준 대가로 쌀 서너 되를 받게 됐다. 그러자 어머닌 방앗간에 갈 삯을 아끼느라 그것을 물에 담갔다가 나무절구에 빻기 시작했다. 몇 시간 물에 푹 불은 쌀알이 어머니가 내리치는 절구 공에 의해 분쇄 될 때마다 금세 맛있는 떡국을 먹을 것 같아 그 모습만 바라봐도 갑자기 배가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여 잠시 어머니가 자릴 비운 사이 나는 얼른 떡국이 먹고 싶어서 절구 공을 한껏 높이 들어 내 힘껏 쌀을 빻았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평소 나무 결에 살짝 금이 간 절구는 졸지에 쩍 갈라지면서 두 동강이 나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어느 정도 분쇄됐던 떡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나의 비명 소리에 놀라 황급히 밖을 뛰쳐나온 어머니는 그 광경에 할 말을 잃고 앞치마에 손만 닦으며 안절부절 하였었다. 나의 성급함 때문에 그해 설날엔 우리 가족이 그토록 먹고 싶어하던 떡국은 영영 맛볼 수 없었다.

어머니는 떡국대신 밀가루로 떡가래마냥 길게 반죽을 하여 떡국에 들어갈 떡점처럼 동그랗게 썰었다. 간장만 부은 멀건 국물에 동글동글한 모양의 수제비국은 배가고파서인지 떡국못지 않게 맛있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어린 날 학교 도시락을 못 싸갈만큼 지독한 가난을 경험해서인가. 아무리 먹을 게 넘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집안에서 쌀 한 톨도 헛되이 버리지 않는 게 습관이 됐다. 어찌 이 뿐이랴. 겨울철엔 속내의를 입으며 불필요한 전기는 플러그를 뽑아 에너지를 절약한다. 허드레 물로 화분에 물을 주고 집안 청소를 한다. 뿐만 아니라 가계부를 꼬박꼬박 써서 낭비를 막고 있다. 먼저 저축부터하고 나머지 돈으로 살림을 산다. 그렇다고 자린고비는 아니다. 경사(慶事)는 다 못 챙겨도 가까운 지인들의 애사(哀事)는 챙긴다. 좋은 사람 만나면 밥도 잘 산다. 하나 친구들의 명품 핸드백, 외제 차, 값비싼 모피를 구입했다는 자랑엔 귀를 닫는다. 나의 저금통장에 잔고가 늘어나는 이상 그들의 소비가 결코 부럽지 않기 때문이다.



/김혜식 하정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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