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참외를 깎아먹으면서 그 아삭한 맛에 또 다시 감탄한다. 교육시간에 선호하는 음식 중 참외가 일번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을 기억한 교육생이 참외를 한 봉지 가져와 내게 내 밀었을 때 "앗! 참외다"그러면서 큰 소리로 반기자 모두들 활짝 웃었다. 기쁜 감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니 참외를 사온 교육생에게 따로 감사표현을 하지 않고도 감사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유쾌한 기분으로 참외를 나누어 먹으면서 참외로 인연이 된 후배가 떠올랐다.

그녀가 처음 내 사무실을 방문한 것은 무슨 복지재단의 후원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바쁘지 않은 시간이어서 후원금을 내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방송통신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후배라고 반기자 갑자기 친근감이 돌아 사적인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며칠 후 선배님 좋아하는 거라며 검은 봉지에 담긴 노란 참외를 꺼내던 그녀에게 깜짝 감동했다. 무심코 한 말을 기억하고 길을 가다가 참외를 보자 생각이 나서 사들고 왔다는 것이다. 그 일로 우리는 가끔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선배님 저 죽고 싶어요.' 한동안 뜸하던 그녀의 소식이 문자로 전해졌다. 깊은 밤, 나른하게 잠에 섞인 신경이 화들짝 깨어 머리가 띵했다. 문자를 몇 번이고 살펴보았다. 앞도 뒤도 없이 죽고 싶다는 말만 있었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으면서 통화를 시도했다. 차에 시동을 걸때까지 통화가 되지 않아 불안했지만 일단은 둔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둔포에 산다는 것 말고는 정확한 주소를 알 수 없지만 갈 수 있는 한 가까이 가야 할 것 같았다.자정이 다된 어두운 길을 달리면서 두려움에 가슴이 쿵쾅 거렸다. 시내를 벗어 날 때 쯤 겨우 통화가 되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계속 길을 물어가며 거리를 좁혔다. 주유소마저 불이 꺼진 늦은 밤에 시골길에서 집을 찾는다는 게 너무나 어려워 등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같은 곳을 서너 번 왔다 갔다 한 뒤에 겨우 동네로 들어가 작은 컨테이너주택을 찾았다.

처음엔 세상 다 귀찮다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그녀가 내가 도착하니겸연쩍게 웃으며 마당에 나와 나를 맞아 주었다. 사람 놀라게 한마며 등감을 후려치고는 와락 안아주었다. 그 밤에 그녀가 내 앞에 그대로 서 있다는 게 너무도 고마웠다.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고마워서 눈물이 흘렀다. 이혼 후 갑자기 어려워진 경제적 상황과 외로움에 죽음의 유혹을 받은 듯 했다. 친한 친구에게 빌린 돈 5만원을 독촉 받다가 울컥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누구에게인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게 나였다. 친하지도 가깝지도 않은 내게 자신의 목숨을 끊고 싶다고 문자를 보낸 것이다. 무엇에 홀린 듯 찾아 들어간 후배의 작은 집에서 새벽녘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갈 방도를 강구했다. 나 역시 그 때는 직장을 그만 둔 터라 크게 여유 있는 사람이 못되어서 현금으로 도와 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사업을 해보려고 쥬얼리 공장에서 직접 사온 물건들이 내게 있었는데 팔다가 남은 것을 다 내주었다. 가끔 전화 목소리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를 전해 와서 다행이다 싶었다.

한 동안 뜸하던 후배가 지난 연말에 간곡히 시간을 내달라기에 따라나섰더니 마사지샵으로 안내를 하는 것이다. 꽤 비싼 대금을 지불해 놓고 시간나면 와서 피로도 풀고 피부도 가꾸라는 것이었다. 논문 쓰느라 부썩 꺼칠해진 피부가 호사를 했다. 아직도 몇 번은 더 갈 수 있지만 아껴두고 있다. 그 때 '자살'을 결심했던 후배가 쥬얼리를 판돈이 기반이 되어 '살자'로 결심한 후, 불과 3년 만에 많은 성공을 했다고 한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기를 각오하고 살아낸 결과, 경제적인 자유를 얻어낸 것이다. 업무차 홍콩에 갔다가 사왔다며 멋진 가방을 건네는 후배에게 나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어두운 방에서 죽음을 결심했던 그녀가 생기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고마워 가방을 건네받았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 한다고 말하는 것, 어쩌면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기술인지도 모르겠다. 참외를 깎기가 무섭게 한 조각씩 집어 들고 그 단맛을 음미한다. 강의실 가득 향이 퍼진다. 참외처럼 노란 개나리가 툭 툭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봄도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어찌하였든 '살자'라고 결심만 하면 말이다.


/유인순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장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