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게 말해서 인생은 자기실현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神을 위해서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는 신에게서 도망하고 싶지 않았다. 신에게서 도망하고 싶지 않았지만 신이 필요했다. 자기의 노력의 목적이 다만 스스로의 가능성의 실현이라고 하는 것만이 아니고 무언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 필요했다. 인간은 역시 자기실현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어떤 노력을 해도 어떻게 자기를 실현해도 결국 인간은 죽는다. 결국은 죽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역시 허무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다. 사람이라면 태어났을 때는 벌거숭이가 아닌가. 죽어갈 때도 벌거숭이가 아닌가. “그러므로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열심히 하는 거다.”에서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나 역시 가끔 “공허함”을 피할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할까”하고 허무해졌다. 나는 신이 필요했다. 영원 절대인 신을 위해서 자신을 바쳐서 노력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무언가 “숭고한 신”을 위해서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번민하고 괴로웠던 것으로 하면 이미 인간에게 아는 것은 “살아있다.”고 하는 것뿐이었다. “命理”생명의 이치. 그래서 나는 命理學이 좋다. 그래서 공부한다. 그 이외의 것을 가져오는 것은 지금까지의 일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안 것은 신이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은 인간에게는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에 동경한다. 절대에 동경한다. 얻어보았자 공허로 텅 빈 것이 아니고 결코 꺼지지 않는 확실한 것을 인간은 탐내고 있다. 나는 “파우스트”를 읽었을 때도 그것은 괴테의 영원으로의 절규인 듯한 마음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또한 그런 것 같은 마음이었다. 理性에 의해 끝내 인생의 의미를 찾기에 실패한 사람들도 어떻게 해서라도 인생에 의미를 찾고 싶고 어떻게 해서라도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확실하고 싶었다. 나는 절대가 필요하다. 영원히 필요하다. 공부하고 싶으니까 공부한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을 때도 있다. 그러나 때때로 자기가 공부하고 싶으니까 공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허무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안 것은 살려고 하는 생명이며 의욕이며 “무엇 때문에 살아있나”는 나에게는 절대로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서럽게도 허무함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신앙으로 갈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인생은 모든 삶의 방법을 용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 삶의 방법으로도 “진실”이라는 절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어도 다만 좋기 때문에 하고 있다 라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아무리 산이 좋아도 산에 가는 것이 단지 좋으니까 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은 아무래도 만족할 수 없다. 그 밖에 무언가 숭고한 목적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숭고한 목적을 찾아내면 그것은 거짓밖에 안 된다. 인간은 절대를 동경한다. 불멸의 연인, 영원한 사랑···· “사랑하고”, “사랑해서”, “좀 더 사랑하고”, “죽도록 사랑한다.” 서로 절대를 확신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살고자 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며 침착해진 나도 다시 이 허무함의 극복을 위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나는 영원으로 이어지고 싶은 것이다.

“보편은 개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영속적이다. 개별은 끊임없이 왔다 가는 돌아가고 하는 큰 파도속의 하나의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 개개의 인간은 태어나서 죽어가고 있으나 보편으로서의 인간은 영원하다.”고 하는 플라톤의 설(說)이 무슨 도움이 되랴.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참된 육체를 가진 개개의 인간인 것이다. 내가 안 것은 “보편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나로서는 모른다. 아는 것은 육체를 가진 자기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뿐인 것이다. 그 의미로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이고 그리스도교보다 실존주의자이고 싶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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