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른다. 아는 것은 그래도 또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생명의 소리이다. 그래도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신이다. 인간은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유는 묻지 말라. 산다는 것의 이유는 지금 살아있는 것 중에 있다. 사랑하는 것의 이유는 사랑하는 것 중에 있다. 소설(小說)의 줄거리만을 따라가 보는 것만으로는 소설을 읽는 것이 되지 않는다. 어떤 대하소설도 줄거리만으로는 대하소설이 되지 않는다. 대하소설다운 이유는 그 개요(槪要)이외의 다른 곳에 있다.

인생도 또한 같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기가 생기고 그리고 죽는다. 어떤 대소설(大小說)도 줄거리 만이라면 원고지 2, 3매로 끝난다. 소설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속에 자기를 잊고 읽음으로서 재미가 있는 것이다. 인생도 오늘의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야만 멋진 것이다. 인생의 줄거리를 쫓는 것은 소설의 줄거리만을 읽는 것이다. 인생이란 자기 속에 있는 가능성이 하루하루 실현되어가는 과정이다. 인생은 그 자신이 목적이다. 살려고 하는 의욕은 인생을 재료(材料)로 하여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다. 살려고 하는 의욕은 갖가지 모양을 하고 나타난다. 사랑하고 싶다, 학문을 하고 싶다, 일을 하고 싶다, 스포츠를 하고 싶다. 한 편이 경영자(經營者)이며 또 한 편이 노동자라도 공(共)히 그것은 살려고 하는 의욕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사랑하고 있는 자를 향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라고 물어봐도 결코 그들은 대답할 수 없다. 그들이 아는 것은 다만 자기들이 지금 이렇게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무엇 때문에 성장(成長)하는지는 모르나 나무는 성장하고 초목은 자란다. 아는 것은 그것뿐이다. 사람들은 비록 우행을 저지르면서도 괴롭다 괴롭다고 하면서도 살고 있다. 살려고 하는 의욕은 전력을 다해 나타나려고 한다. 화산(火山)이 폭발하는 것처럼 살려는 의욕은 폭발하여 나타난다. 살려고 하는 의욕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것을 누르고 있는 무엇인가의 장해(障害)가 있기 때문이다. 물이 들어있는 병을 거꾸로 해도 마개가 있는 한 물은 쏟아지지 않는다.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살려고 하는 의욕이 젊음과 함께 발현(發現)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생명의 놀랄 정도의 힘을 부정(否定)하는 것은 아니다. 살려고 하는 의욕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어떤 뚜껑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 살려고 하는 의욕이 구체화(具体化)하는 곳의 출구(出口)이다.

살려고 하는 의욕은 우리의 배후(背後)에 있으며 항상 나타나려고 한다. 전혀 생기가 없었던 아가씨가 연애를 하자마자 갑자기 생기가 나고 눈이 반짝거린다. 갑자기 상냥해지고 발랄해졌다. 만나도 번번이 인사도 못하고 풀이 죽어있던 남자가 신흥종교의 신앙에 빠진 순간 자신(自信)이 넘쳐서 노상에서 만나도 “여- 안녕하십니까?”하며 손을 들어 인사를 하게 된다. 나는 지금 사랑이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신흥종교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살려고 하는 의욕은 자기를 나타내려고 항상 기회를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성격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시대가 달라도 살려고 하는 의욕이 끊임없이 그 배후에서 인간을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모든 것 다 잃어도 용기만은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살려고 하는 의욕은 용기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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