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인생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생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인생은 가치가 없다. 다만 인생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사는 인간에게는 인생이 점차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어느 것이든 가능할 것이다. 어느 쪽이 바르다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의 범위에는 없다.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에게는 인생은 긍정적으로 전개하고 인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에게는 인생은 부정적으로 전개한다는 것뿐이다. 인생을 끝까지 살아본 뒤에 거기에서 인생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처음에 인생을 긍정하고 달려드느냐 인생을 부정하고 달려드느냐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물건은 보거나 시험하거나 함으로써 비로소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정한다. 음식물은 먹어봐야 맛이 좋은지 나쁜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다르다. 처음부터 어느 쪽인가를 결정하고 달려드는 것이다. 나는 인생을 무가치 하다고 주장하는 인간을 향해서 반론할 마음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왜 살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것은 살아있다고 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인생을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인생을 우선 긍정하고 살아간다. 성공을 해도 실패를 해도 인생을 긍정하고 달려든다. 나는 인생을 긍정적 입장에 서서 본다.

“사람이라면 태어났을 때는 알몸이 아닌가. 죽어가는 것도 알몸이 아닌가.” 그 후에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에 큰 일을····”라고 부언(付言)할 수도 있고 또는 “그러므로 무엇을 해도 바보스럽다”고 부언할 수도 있다. “인생은 짧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 후에 “사랑하라, 여인아”라고도, “공부해라 사나이여”라고도 부언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러므로 무엇을 해도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부언할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 한 가지 일을”, “사랑하라, 여인이여”, “공부하라 사나이여”라는 표현을 택했다. 어느 쪽이라도 좋다.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그것은 당신 뜻에 달려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결국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은 아름답게 눈물을 머금고 사는 쪽이 좋지 않을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한 가지 일을”선택하는 이유는 다만 그것뿐이다.

선(善)과 악(惡)을 올바로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도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도덕이란 “살려고 하는 의욕”과 “살려고 하는 의욕”의 조정(調整)의 원리(原理)이다. 인간을 떠나서 도덕은 없다. 도덕은 인간의 문제이다. 지금 이 세상을 단 한사람이 살아있다고 하자. 이때 도덕이라는 문제가 일어날 것인가? 일어나지 않는다. 도덕은 “살고자하는 의욕”과 “살고자 하는 의욕”의 조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을 떠나서 도덕은 없다. 도덕이란 보다 많은 사람이 보다 좋은 “살고자 하는 의욕”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선이라든가 악이라든가 그러한 것은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두 이 “살고자 하는 의욕과 살고자 하는 의욕”의 조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범죄를 벌하는 것은 그것이 타인의 “살려고 하는 의욕”을 부당하게 억압했기 때문이다. 대체 인간은 선이라는 등 악이라는 등 말하면서도 어째서 너만이 돼지를 잡아먹고 소를 잡아먹고 닭을 잡아먹는 것이 허용되는가? 이토록 나쁜 짓을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악행을 저지르고 그래도 인간을 여전히 올바르다느니 나쁘다느니 하고 득의양양하게 말하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범(犯)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하는 것인가. 나는 싫다. 나는 그렇게 바보가 아니다. 나는 살고 싶다. 살고자 하는 의욕은 인생 생활의 모든 면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고기를 먹는다.

들에 핀 꽃을 짓밟고 길가의 풀을 짓밟으며 걷는 일도 있다. 나는 때로 그러한 것으로 마음이 몹시 아파서 운다. 나쁜 짓을 하기 싫으면 지금 당장 죽는 이외에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고 싶은 것이다. 악을 행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정의(正義)라든가 도덕이라든가 하고 인간을 떠나서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살고자 하는 의욕의 충돌(衝突)의 조정일 뿐이다. 결코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살려는 의욕, 살려는 생명은 우리를 매개(媒介)로 해서 자기를 실현해 간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살려고 하는 의욕, 몽롱한 충동의 형식에 휩싸여 있지만 그 충동은 자기를 만들어 내고 자기를 객관화(客觀化)하려고 노력한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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