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겁내어 아무것도 안한다고 하는 것은 최대의 죄악이다. “청춘시대의 갖가지 우매함을 가지지 않았던 인간은 중년에 이르러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것은 명언이다. “청춘의 실책(失策)은 장년(壯年)의 승리나 노년의 성공보다도 바람직한 것이다.”라고 한 것도 명언이다. 그 중에 잘못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청춘은 청춘이라고 부를 가치가 없다. 그림물감으로 아름다운 색을 내려고 할 때에 아름다운 원색(原色)만을 섞어도 참다운 아름다운 색은 나오지 않는다. 참다운 아름다운 색은 그 속에 그것과는 정반대의 더러운 원색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아름다운 청춘이란 그 속에 과오를 내포한 청춘이다. 실연(失戀)의 경험이 있는 청춘이다. 실패한 청춘이다. 상처받은 마음을 지닌 청춘이다. 청년에 있어서 좋지 않은 것은 다만 두 가지 그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 하나는 타인의 “살고자 하는 의욕”을 방해하는 것이다. 선(善)과 악덕(惡德)과의 죄, 그리고 미(美)와 추(醜)와 살려고 하는 의욕은 그 속에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 이런 것을 살려고 하는 의욕의 관련 하에서 볼 때 거기에 살려고 하는 생명이 상처 받으면서도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이 내재된다. 살려고 하는 의욕의 발현(發現)으로서 인간을 그리고 인생을 볼 때 나는 인간이 못 견디게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인다. 우쭐대고 있는 인간, 허영심에 찬 인간은 일찍이 나에게는 추하게 보였다. 그러나 살려고 하는 의욕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더욱 살려고 하는 씩씩한 자세를 그 속에서 볼 때 나는 왠지 그 인간이 사랑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모든 인간이 선인(善人)으로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악인으로서 살고 싶었을 것인가? “살려고 하는 의욕”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이것뿐이다.

인생은 짧다. 무엇을 해도 결국은 죽어버린다. 그러나 연인(戀人)들끼리는 함께 있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열렬하게 불탄다. 꽃은 피었다 지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또한 인생도 짧은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짧은 인생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만 살려고 하는 의욕이 지극히 강한 곳에서 사는 것이다. 본디부터 수다스런 여자는 조잘거리고 살면 되는 것이다. 말이 없는 여자는 잠자코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바보스러운 것은 너무 조잘대고 수다를 떨면 정숙하지 못하다고 생각지나 않을까 해서 잠자코 있거나 혹은 본래 말이 없는 여자가 말을 안 하면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무리하게 떠드는 것이다. 성격적으로 살아라! 다만 그것뿐이다.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고 해서 죽어버리면 그 자식(子息)의 어머니는 어떻게 될까. 자식의 인생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인생과 관계가 없는 신(神)이라든가 저 세상이라든가, 도덕이라든가 하는 데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자식의 인생은 살고자 하는 모친에게 있어서 의미가 있다. 하나의 인생은 다른 인생에게 있어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밖에 인생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 묻는다면 이제 더 할 말이 없다. 어쨌든 내가 아는 것은 살려고 하는 의욕과 인생이 아름답다는 것뿐이다. 인생은 인생 그 자체를 위해 있다고 하는 것뿐이다.

나는 나 자신의 인생을 거닐고 있는 것이다. 타인(他人)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상관없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는가. 어느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을 더욱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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