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것은 항상 싱싱해서 좋다. 싱싱함은 곧 질이나 그 양의 상태가 양호하다는 뜻이다. 어느 날 하릴없이 우리 집 물건을 손꼽아 봤다. 장롱, 식탁, 책상, 오르간 등 오래된 살림들이 태반이다. 이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잔뜩 끌어안고 사는 이유는 그동안 내 손때가 묻어 정겨워서가 아니겠는가. 뭐니 뭐니 해도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항아리 속에 담긴 장류이다. 어떤 항아리에 담긴 된장은 거의 30여 년 가까이 된다.

장이 가득 든 옹기들을 우리 집 화단에 모시고 사는 이유도 우리 고유의 음식에 내 입맛이 길들여져서이다. 공장에서 가공된 음식들은 썩 입에 맞지 않다. 발효식품이어서인지 장류들은 오래 묵을수록 깊은 맛이 있다. 가장 오래된 된장인 경우 그것으로 찌개를 끓이면 된장찌개 국물이 먹물처럼 새카맣다. 색깔이 손님상에 올릴 음식으로 마땅치 않게 보인다. 하지만 맛만큼은 보기와 다르다. 된장은 묵을수록 맛이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성싶다. 오래된 된장의 깊고 구수한 찌개 맛에 매료될 때마다 사람 관계도 이와 같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눈만 뜨면 우린 많은 이들과 만남이 이뤄진다. 나의 성격 탓인지 처음 만난 이에겐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점이 바람직 한 것은 아니리라. 사회에 올바르게 적응하려면 새로운 사람과도 친분 관계가 원활이 이뤄져야 대인관계가 원만하다. 무엇이든 새로움은 호기심을 촉발시키는 것 같다. 인간은 항상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 하리라.


- 온고지신


그러나 꼭 새로운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경우도 있다. 옛것을 숭상하며 본받아 새로움을 창조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옛 문화와 전통을 뒤돌아 볼 필요가 있으리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 역시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친분을 쌓다가 소소한 일로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를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어떤 지인이 십수 년 된 자신의 친구와 관계를 끊었다고 한다. 사연을 듣고 보니 다툼의 원인이 사소한 일이었다. 사사로운 일로 어찌 십여 년이 넘게 쌓아온 정을 단칼에 잘라버릴 수 있을까. 헌 친구 버리지 말라는 옛말도 있잖은가. 나에겐 초등학교 때부터 수십여 년의 우정을 지켜온 친구가 몇 명 있다. 햇수로 따지면 참으로 오랜 기간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결코 마음을 뒤집지 않는다. 혹여 상대의 허물이 눈에 띄면 서로 덮어주기 바쁘다. 이토록 오랜 시간 변함없는 우정을 지닐 수 있었던 비법은 딴 데 있지 않다. 친구들이 가슴으로 의(義)와 정(情)을 소중히 여겨서이다.


- 계절의 여왕


이제 계절의 여왕 5월이다. 그토록 화려했던 봄꽃이 허무히 지고 꽃 진 자리에 꽃보다 더 어여쁜 연록색의 이파리들이 하루가 다르게 그 초록빛을 더하고 있다. 가정의 달이기도 한 5월엔 어버이날, 스승의 날, 어린이날이 있는 날이기도 하다.

사람으로서 그 도리를 지키는 일에 꼭 날짜가 필요할까. 오죽했으면 이런 기념일은 만들었을까싶다. 이런 날만이라도 다시금 부모님의 은혜, 스승님의 은혜를 새삼 되돌아 볼 일이다. 부모님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맹목적인 사랑을 변함없이 주는 사람이다. 이런 부모님 버금가는 분들이 계시다면 스승님이 아닌가. 이분들은 제자들을 위해 당신의 간까지 빼주는 심정으로 학문과 지혜를 가르친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가장 우리 곁에 오래도록 남는 마음은 의(義)와 정(情)이다. 의(義)는 사람답게 처신할 때 지킬 수 있는 덕목이다. 정(情)에는 매사 감사함을 지니게 하는 따뜻한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오월은 감사의 달이다. 이 달만큼이라도 그동안 잊고 지냈던 부모님, 스승님, 그리고 이웃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랴. 봄이 성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 봄기운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따스함이 가득 번졌으면 좋겠다.



/김혜식 하정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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