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황혜영 서원대학교 교수(교양학부)

동양화가 일반적으로 정적인 풍경이나 자연물들을 소재로 한 것과는 달리, 서양화는 이야기 속의 인물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은 경우가 많다. 그리스신화는 성서와 함께 서양명화가 가장 즐겨한 소재 중의 하나다. 그러다보니 소재가 되는 이야기를 모르면 그림들이 서로 비슷해 보이기만 하고, 때로는 그림의 내용이 엉뚱하게 오해될 수도 있다. 아르고스를 잠재우는 헤르메스 곁에 있는 암소에게서 이오를 알아보고, 높은 탑에 갇힌 다나에의 치마폭에 쏟아지는 황금비나 레다의 품에 안긴 백조, 에우로페를 납치해 등에 업고 바다를 건너는 황소에게서 제우스의 모습을 읽어내기란 그 내용을 모르고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림 자체의 미적인 가치는 별도의 문제이지만, 신화를 알고 보면 그림이 훨씬 친근하게 느껴진다.

사실 신화를 그린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의 상상을 펼쳐 그림 속으로 신화의 여행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루벤스의 &amp;amp;amp;amp;lt;쇠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amp;amp;amp;amp;gt;에 그려진 생생한 몸부림에서 인류를 출산한 대가로 그가 치르는 고통과 함께 인류의 마지막 구원의 대가인 숭고한 자기희생이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이 신화에 대한 일반화된 해석이라기보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천진무구한 상상에 고무된 나의 주관적인 견해이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그리스 신화의 다양한 설 중의 하나는 제우스의 명령으로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형상에 따라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신에 복종하는 인간을 바란 제우스의 뜻에 반해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탄생시킨 인간에게 두 손을 사용하여 두뇌를 발전시키도록 하였으며, 추위를 이기고 문명을 이루도록 불을 훔쳐다 주었다. 그는 인류에 베푸는 한없는 사랑으로 제우스로부터 끝없이 고통을 당하는 희생을 기꺼이 감내함으로써 인류를 탄생시킬 때 치루지 않은 해산의 고통을 대신한 것이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고통을 인내하는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이 인간의 구원의 선물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고 싶은가? 잘 알다시피 프로메테우스를 벌주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제우스가 인간도 함께 벌하기 위해 에피메테우스에게 아내로 선물한 '모든 것을 받은' 여자 판도라는 그만 금지된 상자를 열어버려 그 속에서 온갖 고통과 불행, 질병 등이 인간 세상에 퍼지게 된다. 뒤늦게 뉘우친 판도라가 상자를 닫았을 때에는 모든 나쁜 정령이 다 달아나버리고 단 하나 희망만이 남게 되었다. 판도라의 상자에 대해 제우스가 인간을 벌주려고 판도라에게 준 것이라는 해설도 있지만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가 인간을 고통, 질병 등 모든 해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것들을 가둬 놓은 것이라는 해설도 있다. 두 번째 설의 경우, 판도라의 상자는 엄밀히 말하면 프로메테우스의 상자다. '미리 아는 자' 프로메테우스가 코카서스 산으로 끌려가면서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가 주는 선물은 어떤 것이라도 받지 말라고 경고하였듯이 그는 판도라가 저지를 일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상자를 열어본 것을 후회하는 판도라가 뉘우치며 다시 상자를 닫을 때 다른 것이 모두 달아나도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희망을 상자의 맨 밑바닥에 숨겨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 있는 희망, 그것은 바로 제우스가 인간에 주고자 한 벌(罰)을 전환시켜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 선사한 마지막 구원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상자에서 빠져나간 온갖 시련이 아무리 우리를 좌절하게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넘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해주는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마지막 구원의 손길 '희망', 그것은 바로 끝없이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프로메테우스 자신의 고귀한 희생을 대가로 인류에 선사한 마지막 선물은 아닐지, 신화와 함께 루벤스의 명화를 보며 떠올린 상상이다.

/황혜영 서원대학교 교수(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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