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포럼] 김혜경 시인ㆍ한국문인협회 회원

오늘 신발을 잘 못 신고 온 것일까 아니면 길을 잘 못 들은 것일까. 구두를 신고 산에 올랐다. 마치 운동회 날 한복을 입고 달리기를 하려는 것과 같은 모양이 아닌가. 친구와 점심을 먹고 가볍게 산책을 한다는 것이 그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정상까지 오게 되었다. 등산복에 편안한 신발을 신은 사람들이 우리를 흘낏거리며 지나갔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굽이 높은 신발은 오르막길에서는 오히려 편안하게 해준다. 높은 굽이 가파른 경사면을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해준다. 정상의 바람은 언제나 맑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정상을 정복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맛보게 된다. 이제 내려 갈 일만 남았다.

누군가 산은 오르기 위해 있다고 했던가. 그러나 내려가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끔은 잊고 사는 경우가 있다. 어디 산만이 그러 하겠는가. 삶의 과정도 오르고 내려와야 함을 거쳐야 한 생을 살았다 하지 않겠는가. 지천명의 나이쯤 되고 보면 생의 포물선에서 꼭지점을 지나 하향곡선에 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사는 일에 바빠 아니 오르는 일에 바빠서 잘 내려오는 일에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쉽게 오르려고 했고 쉽게 살려고만 했었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경사면을 오르는 것이 조금 편안한 것 같아 내려오는 길이 얼마나 더 고된 일이 될 것인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요즘 늘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들도 나처럼 쉽게 오르는 일에만 치중하고 살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변변한 준비도 없이 허위학력으로 무섭게 오르는 일에만 매달려 살아 온 탓 일게다. 내려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사는 동안 명예와 부의 최고 정점에 섰다면 남은 것은 내려오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산길이 어디 늘 평평하기만 한가. 비탈길에서 구르기도 하고 흙이 미끄러져 내리기도 하고 설상가상 비가 오는 날도 있지 않겠는가.

삶을 되돌아 봤을 때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는 잘 늙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한다. 노후를 위해 경제적인 준비도 해야 하고 건강도 챙겨야 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베풀 줄 알아야하는 것도 잘 늙는 법이 되지 않을까. 아무런 준비 없이 자녀나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한다면 그리 아름답게 늙는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바삐 사느라 남을 돌아 볼 여유도 없었을 테니 이웃을 돌아보기도 하고 근사한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멋스러운 늙음이 되지 않을까. 인생이라는 산행에서 안전하게 내리막길을 내려왔다는 것은 아름답게 늙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구두를 신고 비탈을 내려오는 일은 생각보다도 훨씬 힘든 일이었다. 오르막길의 경사를 완만하게 해주던 높은 굽은 내리막길의 경사를 더욱 급하게 만들었다. 나뭇가지와 솟아오른 뿌리를 의지하며 겨우 내려오고 있는데 변덕스런 날씨가 비까지 뿌려대고 있었다. 구르고 넘어지고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추락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삶이란 언제나 오르막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순탄한 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르면 내려와야 한다. 안전하게 잘 내려와야 한다. 잘 내려오려면 차근차근 잘 준비하여 한다. 잘 올라가 정상에 깃발을 꽂는 일도 멋진 일이겠지만 무사히 내려오는 것도 멋진 일이다. 인생의 내려오는 길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더 깊은 향기를 품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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