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에 관한 강연을 하거나 교육상담을 하는 기회가 있으면 으레 자녀들의 용돈 문제가 질문으로 등장한다. “어린이에게 용돈을 주는 것이 좋냐?”, “일을 시키고 그 보수로서 용돈을 주는 것이 어떠냐?”, “초등학교 학생에게 용돈을 어느 정도 주는 것이 적당한가?”, “돈을 주는 대신 먹을 것을 사다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닌가?” 대개 이런 질문들을 받게 된다. 이 질문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구하기 이전에 유태인의 가정교육에서 배워야할 기본적인 태도가 있는 것 같다.

유태의 가정에서는 아직 학교에 가기 이전에 자녀에게 용돈을 준다. 그러나 그 용돈은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저축을 하기 위한 용돈이다. 용돈을 주어 그것을 바르게 쓰는 일을 배우기 이전에 저축하는 일부터 배우게 한다. 이것은 저축의 중요성을 어린이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돈의 가치를 이해시키고 저축의 즐거움을 체험시키기 위해서이다. 유태인에게 있어서 저축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나라 없는 이국에서 오직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재산뿐이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가 저축한 돈만이 생명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린 이와 같은 민족의 경험은 유태인의 저축에 대한 궁극적 태도를 형성시켰으며 그 태도는 교육을 통해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있다. 유태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편견인 “수전노”의 통념도 알고 보면 그들의 억척같이 저축하는 습관과 태도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돈을 쓰지 않고 악착같이 저금만 하니 구두쇠라는 말을 듣게 된 것도 어느 면 이해할만하다.

유태인은 돈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기보다는 천시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바른 표현일 것이다. 동양에서도 그러하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 문화에서는 금전을 천시한다. 돈이란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모임에 가서 강연을 하면 주최자는 으레 거마비라는 것을 준비해 가지고 강사의 호주머니에 억지로 구겨 넣어준다. 물론 흰 봉투에 돈을 넣어 겉봉에는 촌지(寸志)니, 박사(薄謝)니 하는 글자가 적혀있다. 그 봉투를 그냥 건네줄 수도 있는 것이련만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어주는 것은 어찌 고매한 인격자가 그 더러운 돈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는 배려 때문이리라. 따지고 보면 금전을 천시하는 이른바 청빈(淸貧)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장군의 말도 의미가 있다.

이에 비하여 유태인은 금전을 천시하지는 않는다. 돈은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가정에서부터 돈은 유용한 것이지만 돈이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돈을 지배할 뿐이다. 유태의 격언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부자에게는 자녀가 없다. 오직 상속인이 있을 뿐이다.” 돈이 많은 부자의 자녀들은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있을 재산의 상속을 기대하는 생각에서 부모를 공경하는척하기 쉽다는 말이다. 돈이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어느 날 두 사람의 남자가 랍비에게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 한 사람은 그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대단히 가난한 사람이다. 돈이 많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몇 분 먼저 왔기에 차례가 되어 먼저 방에 안내되었다. 상담시간은 대단히 오래 걸려서 한 시간 이상이나 지체한 다음 가난한 사람이 차례가 되어 방에 안내 되었다. 그런데 그 상담은 불과 5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가난한 사람은 내심 분개하였다. 아무리 돈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차별대우를 할 수 있는가? 돈이 많은 부자에게는 성의를 다해서 한 시간 동안이나 상담에 응해주고 나는 가난뱅이라고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눈치를 챈 랍비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 만큼 마음이 가난하니 그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덜리는 법일세.” 돈을 천시하거나 경원시 하지도 않지만 돈만을 추구할 때에 인간은 그 마음이 빈약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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