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친정어머니의 언행이 마치 세 살 어린애와 흡사하다. 며칠 전 어머닌 남편을 위해외식을 시켜주겠다고 하였었다. 이때 남편이 집에서 밥을 먹겠다고 하자 어머닌 갑자기 아파트 현관문을 소리내어 닫곤 휑하니 밖으로 나갔다.

어머닌 사위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싶었는데 왜 거절 하느냐며 노기 띤 음성으로 전화까지 하였었다. 사소한 일이련만 어머닌 감정 절제가 어렵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 처지를 헤아리는 능력을 어머닌 상실했다. 무엇이든 당신 뜻대로 행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바뀌고 말았다. 어머니 성격이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몇 해 전 막내 남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한 어머니였다. 그 충격은 어머니를 딴 사람으로 돌변 시켰다. 예전의 인정 많고 사려 깊으며 매사 똑 떨어지는 냉철한 분별력을 지녔던 어머니가 이젠 아니다. 걸핏하면 화를 내고 남의 말을 오해 하곤 하는 어머니이다. 그런 어머니여서인지 어머니 앞에선 자식들이 말 한마디라도 조심스럽게 꺼내곤 한다. 이런 어머니를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머니와의 대화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언어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 아닌가. 나의 어머니처럼 말 할 때마다 눈치를 볼 경우 대화 단절을 초래 할 수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대화 부재는 대인관계 시 허물 수 없는 벽을 만들기 마련 아니던가. 어머닌 우리가 어렸을 때 말은 항상 입안에 세 번 삼킨 후 꺼내야 한다고 타일렀었다. 또한 남의 말을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한다고 했었다. 상대방의 말을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었다. 늘 객관성을 염두에 두어 상대방의 말뜻이 애매모호할 경우 재차 확인해 말뜻을 정확히 간파해 들어야 한다고 말씀 하던 분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신은 이즈막 초기치매 증세로 판단력을 잃었다. 그 탓에 우리 자식들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 못하기 일쑤이다.

어머니 같은 경우는 타인과의 대화가 매우 어렵다. 대화에도 예의가 있잖은가. 상대방 앞에서 지나친 자기자랑, 남의 허물을 들추는 일, 남이 나누는 대화를 가로채어 그 내용을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오해한 나머지 남에게 시비를 거는 몰상식한 행위 등은 삼가 해야 하리라.

이런 예절이 뒤따르는 대화법이야말로 인간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고도 남음 있다. 하지만 삶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겐 한가로이 앉아서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며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요즘 노모포비아(No-Mobile Phobia)라는 스마트 폰 중독 상태를 일컫는 신조어까지 탄생 시켰다. 이 말은 스마트 폰을 몸에서 잠시만 떼어놔도 불안증세를 보이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란다. 젊은이들은 상대방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온기 없는 기계를 통하여 상대방과 신속하고 편리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익숙하다. 스마트 폰을 통한 채팅인 카카오톡(kakao talk)이 그것 아닌가. 이런 대화방법엔 한계가있다.

대화는 상대방의 음성, 제스처, 표정 등을 통하여 말 속에 깃든 의중을 직접 눈으로 판단하며 나누는 게 올바른 대화법이 아닐까 싶다. 우린 상대방과 마주앉아 정겨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지난날 무수히 있었기에 이만큼 나라의 부강이 이뤄졌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칠까? 대통령이 세계 정상들과 회담을 위해 외국 순방을 왜 나가는가. 회담은 다 알다시피 국가 간의 국익을 위해 중요 한 사안을 놓고 정상들과 대화를 통하여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행위 아니던가.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의 진정한 대화법이 삶에 왜 절실히 필요한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으리라.



/김혜식 하정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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