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의 관(觀)이란 어떤 뜻을 가진고 하니 관조(觀照)라는 뜻인데 마음의 거울에 모든 물체를 비춰본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관(觀)이라 하며 눈(眼)으로 보면 견(見)이 된다. 눈으로 보면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마음으로 보면 더러운 것도 있다. 눈으로 보면 짙은 화장에 값비싼 모피 옷에 다이아몬드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며 뽐내는 미인도 함부로 몸을 팔거나 하면 그것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이며 남자 역시 부정부패로 치부하여 거들먹거리면 그 또한 추한 것이다.

색정(色情)이니 하는 것은 성인군자(聖人君子)도 여간 참아내기 어려운 것이며 색(色)위에 영웅 없다는 말도 있는데 저 유명한 중국의 측천무후(則天武后)라는 여제(女帝)도 당대에 이름난 고승 신수(神秀)와 혜안(慧晏)대사를 시험대에 올리기도 했다. 아름다운 궁녀로 하여금 두 대사의 목욕 시중을 들게 하였는데 궁녀의 손으로 때를 밀 때 “혜안”은 바위나 목석같이 감정이 없었고 “신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혜안을 자기 곁에 늘 두고 자문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정(情)”은 마음의 눈으로 보면 별것이 아닌데 반하여 그냥 눈으로 보기 때문에 흥분하고 이끌리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관”은 마음으로 보고 비추는 것이요, 세음(世音)이란 문자 그대로 해석해도 세상의 소리, 모든 세상의 경험, 세상 사람이 원하는 것 등등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며 이 참다운 정(實相의 情)으로 중생(衆生)을 대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찾듯 친근한 것이다. 세상의 소리란 천태만상(千態萬象)이 연출된다.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위시해서 꽃도 피면 지고 초목(草木)도 성하고 시들고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무상(無常)함 속에 그 근본은 원래 생사(生死)도 없고 피고 지고 시드는 것도 없는 철저한 진리를 체득(体得)하여 본다는 것이 관(觀)에 해당하며 자유자재(自由自在)하여 아무거리낌 없기에 “관세음보살”이라고 할 것이다.

자비(慈悲)를 사랑이라고 해석하는데 사랑하면서도 무지(無知)하고 어리석은 자를 어여삐(悲) 여긴다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 두 가지가 성립되지 않으면 참사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살은 깨달았으되 정이 있고(覺有情), 귀하고, 천하고, 부자다, 가난하다, 유식하다, 무식하다 하는 이 차별심(差別心)을 떠나 모든 것이 평등하게 “나”와 “너”라는 차별까지 초월하여 중생을 건진다는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런 보살의 가장 상징적 인물로 관세음보살을 지적하여 이 반야심경의 수행 중심인물로 선정한 것이다.

“행심반야(行甚般若)”는 문자 그대로 깊이 반야를 수행한다는 것이며 어떤 수행도 어느 곳에 집착(執着)하면 안 된다. “중생” 세계는 대개 자기(自己)라는 것에 집착하고 법(法)이란 실재(實在)에도 집착하고 눈, 귀, 코, 입, 몸, 뜻(六識)에도 집착하고 어떤 모습을 보면 그 모습에 집착하고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 얽매이게 되며 관세음보살의 삼십이상(三十二相)에도 넋을 잃는 등 그런 집착은 도리어 스스로 미로(迷路)에서 헤매는 어리석음을 자아낸다.

저 유명한 한산(寒山)도 주변 경관에 넋을 잃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마저 잊었다는 것을 보면 집착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봄이 왔다.”하고 요란하게 화사한 봄을 구경하러 온 산을 헤매도 그저 아지랑이만 보일락 말락 봄이 어디 왔는지도 모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앞에 핀 몇 그루의 개나리 , 진달래를 보고 “봄”이구나 하고 느낀다든지 도연명(陶淵明)이 울타리의 국화를 손질하다 문득 남산을 바라보는 경지에서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깨닫는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숙연해 짐을 느낀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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