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25전쟁 발발 62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수 많은 장병들이 전쟁 참화속에 아침이슬 처럼 사라져갔다. 군번도 없이, 소속도 없이 죽어간 장병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의 희생 속에 우리는 지금 선진국의 대열에서 경제적 부를 누리며 살고 있다.

소년병으로 또는 학도병으로 전쟁터로 달려가 적과 싸우다 전사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황이다. 군번 없는 학도병은 죽은뒤에 누구인지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종자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6.25전쟁은 우리 역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쟁에 유엔 16개국의 전투 병력이 지원됐으며 5개국은 의료를 지원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도움이 없었으면 우리 민족이 지금 어떻게 변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유엔군 사망자 62만8833명, 부상자 106만4453명, 실종자 47만267명에 달했으며 미군은 사망자 5만4246명, 부상자 10만3284명, 실종자 8177명이었다. 우리 국군도 사망자 5만8127명, 부상자 17만5743명, 실종 17만2400명이나 됐다. 인명 피해만 이 정도니 재산 피해는 또 어느 정도였을까. 총칼과 포탄으로 인간의 소중한 목숨을 빼앗는 전쟁은 그래서 없어져야 한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입대한 어느 가장의 이야기는 가슴을 뭉쿨하게 한다. 충주농업고를 다니던 그분은 6.25가 발발하자 나라를 지키겠다며 자진 입대했다. "피 끓는 젊은이여! 조국이 우리를 부른다. 지금 우리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때다. 펜 대신 총을 들고 적을 향해 나가자."라며 학도병으로 지원한 것이다.

854고지에 투입된 그는 낮에는 탈환하고 밤에는 빼앗기는 악순환 속에 매일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주변에는 수많은 전우의 시체가 나뒹굴었으며 시체를 방패 삼아 전진 또 전진해야만 했다. 중공군이 밀려와 인해전술을 감행할때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무리 사살해도 중공군은 끊임없이 고지를 향해 올라왔다.

이같은 전쟁속에 학도병 상당수는 사망했지만 그는 겨우 목숨을 구하고 장교가 되어 군 생활을 계속했다. 제대후 공무원이 되었으나 악몽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전쟁의 참혹한 기억은 희미해지지 않고 오히려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이다.

삼 남매를 둔 그는 술만 먹으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하는 전쟁 노래를 끊임없이 불렀으며 전쟁에서 겪은 이야기를 아이들 앞에 늘어놓곤 했다. 학도병으로써의 자부심은 오히려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더욱 떠올리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 항상 중공군이 몰려 오는 악몽에 시달렸고 죽은 전우의 시체가 떠올라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50대 젊은 나이로 사망한 것이다.

이같은 아버지의 괴로움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새롭게 깨달았다고 한다. 팔과 다리를 잃은 상의용사는 국가유공자로 대우를 받았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하여 고생한 수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18세 미만의 참전병은 소년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법상 18세 이하의 미성년자는 입대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국방부는 소년병 규모를 공식 확인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소년병은 2만9603명이며, 이중 전사자가 2573명이었다는 것이다. 소녀병도 467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18세 이하의 어린 나이여서 총도 제대로 들지 못할 때이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진 입대하여 수많은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이같은 선조들의 애국 정신이 있어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종북주의자가 활개를 치고 국회의원에도 당선이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조무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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