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느 여류 문인의 집을 방문한 적 있다. 그 때 서재에 꽂힌 책을 한 권 뽑아 책장을 펼치는 순간 나는 그녀의 정성스러움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었다. 다름 아닌 어느 수필가가 보내온 수필집 첫 장에 얌전히 붙여진 우편물 봉투 주소 때문이다. 두 번째 책장엔 한지에 곱게 쓴 수필집 저자의 서명이 눈길을 끌기도 했었다.

요즘은 작가들도 자신의 책을 남에게 보낼 때 일일이 서명 하는 게 번거로워서인지 아예 서명을 인쇄해 책장에 붙이곤 한다. 물론 삶에 쫓기는 현대엔 편리함이 우선이므로 결코 그것이 눈에 거슬리진 않는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 남의 책을 받았을 때 정성껏 저자의 서명이 쓰여 있는 책들은 왠지 정감이 가 소중히 다루곤 한다.

내가 만난 여류 문인이 자신이 받은 책 맨 앞장에 보낸 이의 주소를오려붙인 것은 공을 들이는 행동이 아닐까 싶다. 이는 남이 보내 준 책에 대한 보이지 않는 감사의 표시이리라. 아무리 문인일지라도 자신의 저서를 발간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리라.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책을 보내온 저자에게 책을 고맙게 잘 받았다는 인사말을 건넨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또한 그에 보답으로 정성껏 편지를 쓰려고 상대방의 주소를 책 맨 앞장에 오려 붙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가 그런 공을 들이기까진 상대방의 정성이 있었기에 가능 하리라. 발간한 책을 일일이 우편으로 보내는 일도 상대방을 위한 공을 들이는 일이 아니던가. 그날 한지에 직접 자필로 쓴 저자의 서명 또한 그것을 무언으로 말해 주고도 남음 있었다.

공은 공을 낳고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단단히 묶는 끈끈한 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라는 옛 말도 있잖은가. 이에 깨닫는 바 있어 나또한 요즘 발간한 나의 독서 에세이집마다 한지에 정성껏 직접 서명을 써서 붙였다. 이는 나의 책을 읽어줄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겸허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다.

어려서 어머닌 무슨 일이든 항상 공을 들여 행하라고 우리들에게 타일렀었다. 친구를 사귀면 상대를 위해 어떤 공을 들여야 우정이 지속될까를 늘 염두에 두라고 하였었다. 공부를 할 때도 공을 들여 집중 하라고 했었다.

어머니의 타이름을 귀담아 들어보면 공(功)속엔 정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정은 남에게 두면 사람을 낳는다고 하였다. 사람을 낳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의미도 포함 되리라. 공은 결코 건성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마음이다. 무슨 일이든 진정성이 있을 때 행할 수 있는 언행의 본질이 공이기도 하다.

요즘 이렇듯 공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밥상을 대할 때마다 농부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인다. 낟알 한 톨 한 톨마다 농부들의 피땀이 서렸잖은가. 곡식, 채소, 과일 등이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농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다. 우리네야 돈 몇 푼 쥐고 나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농산물이지만 우리 손에 농산물이 들어오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들을 가꾸는 농부들의 피땀을 과연 우린 얼마나 헤아려 보았는가. 더구나 요즘처럼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백여 년 만의 최악 가뭄인 때 농부의 노고는 참으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농부들이 농작물 보살피는 일을 자식 키우듯 키운다고 표현하랴. 농사는 공력이 전부 아니던가. 요즘 농촌도 기계화에 힘입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기계가 발달하였어도 사람의 섬세하고 따뜻한 손길을 기계는 능가하지 못한다면 지나칠까.

농부가 농작물을 자신의 자식 키우듯 보살피는 것처럼 정치인들도 국민들을 위한 정치에 공을 들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과학문명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정치는 그것의 힘을 빌리지 못한다. 정치는 순전히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으로 펼치잖는가. 이로보아 성공한 정치의 밑거름은 공이 전부이다. 이제 대선이 얼마 안 남아서인지 대선 주자들의 행보가 유난히 빨라지고 있다. 이참에 정치인들도 한번쯤 국민을 위한 공력의 실체가 무엇인지 고뇌를 하는 게 정치인의 올바른 자세일 듯싶다.



/김혜식 하정문학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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