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의 교육은 한마디로 말하여 민족정신을 심는 교육이다.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전통, 그 속에 맥맥히 흐르는 민족의 얼을 계승하는 수단으로써 교육이 존재한다.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미국 주요도시의 공항에는 이스라엘행 비행기를 타려는 유태의 젊은이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장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비록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시민이지만 조국 이스라엘의 국난을 가만히 앉아 보고 있을 수만 없다는 정열의 젊은이들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용약전열에 참가하여 조국의 안전을 수호하겠다는 결의에 찬 대열이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다른 어떤 조건보다도 유태민족의 단합된 힘의 과시가 있었기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으리라. 이 보도가 외신을 통해 전해지자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유태 민족의 민족적 단합에 대하여 놀라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어디에서 이 힘이 나오는가? 무엇이 있기에 그토록 강력한 민족의 정열이 솟아오르는가? 그 해답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것은 바로 교육의 힘이다. 그것은 유태인의 혈관에 흐르고 있는 피가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에 새겨진 민족정신의 힘이다. 유태민족이 나라 없는 설움 속에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며 모진 박해를 받아왔으나 그들의 민족교육을 계승해왔기 때문에 이토록 무서운 힘이 샘솟아 나온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중동의 토후국 예멘에 살고 있던 유태인의 이야기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당한 후 그곳에 정착한 유태인들이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언젠가는 바람의 날개를 타고 약속된 가나안땅에 돌아갈 날이 있을 것”을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는 사이에 근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외부의 문명세계와 완전히 두절된 벽지에서 오직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만을 위하여 여호와가 약속한 날을 고대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팔레스타인 땅에 그들의 조국이 건설된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이스라엘의 건국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순간 그들은 여호와는 결코 자기들을 저버리지 않고 약속을 지켜주었다고 감사했다. 4만3천명 중 특별한 사정이 있는 천 여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걷기 시작하였다. 어디로? 물론 조국 이스라엘을 향한 행군이었다. 집과 나귀와 재산을 모두 버리고 어른이나 어린이나 부녀자나 할 것 없이 험준한 산을 넘고 사막을 지나 행군을 계속했다.

우선 행군의 목표를 아덴으로 잡았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안 이스라엘 정부는 부랴부랴 대형 수송기를 전세 내어 이들을 아덴으로부터 이스라엘로 공수하였다. 민족이동 사상 최대 규모의 공수작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때 그들이 생전 처음 보는 비행기를 보고도 하나도 놀라지 않더라는 점이다. 비행장에 내린 그들은 태연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날개를 타고 약속된 땅에 돌아왔다.”라고. 퍽 오래 전 영화이지만 “엑소더스”라는 영화를 본 사람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고국에 돌아오는 유태인들이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땅에 엎드려 그리운 고국 땅에 입 맞추는 장면은 눈물겹도록 인상적이다. 김구선생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한강물을 퍼서 마셨다는 에피소드와 공통된 면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민족의 일체감, 민족의 긍지, 하루 이틀이 아닌 2천년을 한결같이 소망 속에서 기다려온 종교적 신앙- 그것은 단순히 유태민족이 억눌림을 당해온 소수민족의 설움에서 분출되는 일시적인 감상의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유태의 민족적 긍지를 고취하고 어떤 역경 속에서나 그들의 신앙을 저버릴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어린 가슴속에 깊숙이 심어준 교육의 결과이다.

유태의 부모는 어린이가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하기 이전에 뚜렷한 유태인으로 성장해주기를 기대하며 훌륭한 대학에 진학하거나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기 이전에 여호와를 공경하고 당신의 계명에 따라 생활하는 신앙인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며 장차 유능한 기능과 재력으로 공헌하는 사회인이 되기 이전에 민족의 유구한 문화적 전통을 계승받는 유태문화의 계승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이 기대와 민족의 긍지, 그것은 곧 가정교육에 반영된다. 민족의 정신을 심는 가정교육이다. 눈을 감고 걷는 것과 눈을 뜨고 걷는 것과는 다르다. 밤길을 걷는 것과 낮길을 걷는 것이 또한 다르다. 그래서 교육은 위대한 것이다. 눈을 뜨게 하고 어둠을 밝혀 주기 때문이다.



/윤한솔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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