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대 외래교수 이상주

이상주

극동대 외래교수

세상사 본의 아니게 진실이 묵살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진실이 영원히 가려지지만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규명된다. 거기에는 기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기록이 남아있으면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괴산군 청천면 선유동은 이름 그대로 신선이 노닐 만큼 산수가 수려하다.

그런데 선유구곡을 설정한 사람이 이황(李滉)으로 알려져왔다. 『괴산군지』, 『괴산지명지』 인터넷 등 모두 그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문헌 기록과 선유구곡에 새겨놓은 암각자를 검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이황이 저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지명도가 높다보니 어떤 계기에 잘못 와전된 것이다. 이녕(李寧1514~1570년이후 어느시기)은 지금의 선유동에 거주했다.

그리고 선유팔경을 설정했다.

이황이 그에게 두 편의 시를 지어주었다.

선유동팔영(仙遊洞八詠)과 증이거사(贈李居士)이다.

성운(成運)1497~1579)이 칠송팔경(七松八景)을 지어주었다. 이녕의 존재는 오랜 세월 묻혀있었다.

원체 이황의 지명도가 높다보니 그늘에 가려져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녕도 거물이다. 그가 당시 석학대유들에 인정받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에게 시를 써주었겠는가.

서로 학문수준과 의식수준이 맞았기 때문이 가능했던 것이다. 위의 사정을 근거로 이녕에 대해 추적했으면 그런 오류를 범하진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구곡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선유구곡에 대해 연구하다 이녕에 관한 자료를 구득했다.

이만헌(李萬憲)의『소산공문집(小山公文集)』이다. 여기에 칠송거사전(七松居士傳)이 실려있다. 바로 이녕의 전기이다.

그 글에 송인(宋寅)이 전을 지었다는 사실도 기술했다.

이만헌은 "청주에 와서 이녕을 만나지 못하면 두루 여행하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고 했다.

당시 그의 지명도를 가늠케해주는 말이다. 그가 교유한 인물은 이이(李珥)· 박지화(朴枝華)· 신응시(辛應時)· 구사맹(具思孟)등 당대 저명인사이다.

이녕은 청빈과 초속적인 삶을 살다간 고인일사(高人逸士)의 전형이다.

그는 손이 찾아오면 귀천을 막론하고 길게 읍(揖)하고 절하지 않았다. 운인가사(韻人佳士)를 보면 옛날 얘기와 지금의 얘기를 하고 산수에 대해 평론했다.

그리고 구름머리떡을 만들어 대접했다.

이녕이 선유팔경을 설정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2001년의 일이다.

이녕을 사적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인들이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재야에서 벼슬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다간 그가, 여러 사람의 기록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의 자세와 인품이 특출했기 때문이다.

재야인물로 당대 명사들의 지우(知遇)를 받은 인물도 흔치 않다. 삶의 자세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의 생애와 문학을 소상히 알 수 있는 기록이 아직 출현하지 않아 안타깝다.

그는 선유팔경의 승경에 대해 후인들이 어둑할까봐 돌아다니며 정성스럽게 표시했다한다.

어떤 방법으로 표시했는지 지금 그 흔적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이보상 · 정술조 · 김시찬 · 이상간등이 선유구곡을 설정했다는 사실을 2002년 밝혔다. 기록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땅속에 묻혀있어도 옥은 옥이다. 옥은 돌에 섞여도 옥이고, 돌은 옥에 섞여있어도 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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