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조 단군 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온 반만년의 역사를 간직하는 배달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일본사람 역시 개국신인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시조로 하는 3,000년의 역사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느끼며 산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를 대할 때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에는 국경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지금 우리가 구가하는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고, '나'를 있게 해주기 위해 우리의 조상들이 겪어야만 했던 숱한 시련과 수난의 역사 앞에 우리는 감사와 추모의 마음으로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2명의 '한국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북쪽으로 약 50km 거리에 위치한 사이타마(埼玉)현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불어난 도쿄의 인구를 흡수해 나날이 수도권의 베드타운(bed-town)으로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 고마 시즈오(高麗 澄雄)씨는 이 사이타마현 히다카(日高)군에 위치한 '고려신사(高麗神社)'의 신관이다.

신사란 일본의 토속 종교인 '신도(神道)'의 신을 모시는 성전을 일컫는 말인데 그는 이곳에 처음 신사를 지운 시조 '고마 자코오(高麗 若光)'의 59대 후손이요, 더더욱 놀라운 것은 자코오가 서기 668년 나당연합군의 협공을 받아 멸망한 옛 고구려(高句麗)의 직계후손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의 6대 역사문서 중의 하나인 '속일본기(?日本紀)'의 기록에 의하면 자코오는 서기 716년 고구려의 유민 1,799명을 이끌고 일본에 망명하였고, 당시 일본왕실에서는 이들에게 현 고려신사 일대의 토지를 하사해 그곳에 정착하게 했다. 그로부터 무려 59대 1,300년 아득히 오랜 세월을 그들은 고구려의 왕통을 지키면서 머나먼 이국땅에서 왕년에 동아시아 최강의 무위를 떨쳤던 조상들의 공과 덕을 기리며 100년, 1,000년을 하루 같이 살아온 것이다. 참으로 기막힌 사연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야말로 역사의 산 증인이 아닌가? "점령당한 민족과 피해자들의 정신적인 상처를 자신의 아픔처럼 인식케 하는 역사교육을 해야 한다". 이것이 피와 땀과 눈물로써 가혹한 역사노정을 개척해온 잊혀진 명가의 후예가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다.

도쿄에 버금가는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大阪), 이곳에도 수기한 운명의 장난으로 일본에 정착하게 된 한 한국인 가문이 있다. 공고 도시타카(金剛 利隆)씨는 오사카의 본사를 둔 한 건축회사의 사장인데 그의 집안은 지금까지 39대를 일본에서 살아왔다. 공고 가문의 시조 금강 중광(金剛 重光)은 6세기 말엽 백제에서 건너온 건축기술자였다. 당시 갓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율령체제(律令?制)의 기반을 단단히 하기 위해 부처님의 가호를 받고자 조정에서는 오사카에 거대한 사찰의 건립을 계획했다.

일본 역사상 최고의 정치인으로 꼽히는 성덕태자가 여왕 추고천황을 도와 이 일을 추진했는데, 그 당시 일본에는 대규모 사찰을 독자적으로 건설할만한 기술이 없어 선진국인 백제에 기술적 원조를 요청한 결과, 위덕왕이 보내준 3명의 기술자 가운데 시조 중광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것이 지금도 오사카에 그 위용했는데,하는 '사천왕사(四天王寺)'이고, 공고 가문은 그 후 "사천왕사의 수리보수를 담당하라"는 성덕태자의 명을 받들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1,400년 동안 일편단심 목숨을 바쳐 대대로 이 절을 지켜왔다. 실제로 전 사장을 지낸 도시타카씨의 아子)는 오사카 자신의 실수로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그 책임을 지고 아내와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상들의 묘 앞에서 할복자살함으로써 그 죄왕사의하였 것이한다. 담당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 것이한다. "나는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서 백제인으로서, 한국인으로서 고국의 명예와 영광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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