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자신의 잇속 따라 인간관계를 맺는 세태엔 그런 사람에 대한 실망감에 마음을 다치기 예사이다.

이때 흔히 우린 상대방과 관계를 끊겠노라고 결심하곤 한다.

그러나 항상 상종하기 껄끄러운 사이일수록 뜻하지 않은 장소서 자주 마주치곤 한다.

이럴 때 지혜로운 이는 크게 마음먹고 상대방을 곱게 보려고 애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의 동물 아닌가.

가슴을 심하게 다치게 한 사람을 용서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용서'란 단어는 그리스어로 '자신을 풀어주다, 멀리 놓아주다, 자유케 하다.'라는 뜻이란다.

하지만 상대방이 안겨준 상처의 깊이에 따라 용서의 농도도 차이가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가 그렇다.

그동안 그들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온갖 악행을 떠올리면 일본에 대한 우리의 적개심을 쉽사리 누그러뜨릴 수 없다.

배려·베풂 부족한 일본


이번 영국 런던 올림픽 한·일 축구 전에서 우리 선수들이 축구를 승리로 이끈 것은 참으로 통쾌한 일이다.

솔직히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한을 심어준 국가가 아닌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침략한 그들 아닌가.

임진왜란 및 일제강점기, 귀 무덤, 코 무덤, 정신대 위안부 문제, 요즘엔 위안부 소녀상 말뚝 박기 등은 들추기만 해도 가슴 속에서 부아가 치밀곤 한다.

특히 그들이 36년간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며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온갖 만행 앞에선 더욱 그러하다.

젊은이들을 강제 징집해 일본으로 끌고 가 가혹하게 탄광 일을 시킨 일, 위안부 문제 등만 떠올려도 치가 떨릴만큼 미운 그들이다.

나의 외할아버지께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가마니를 많이 안 짰다고 의자에 묶어놓고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패 그 후유증이 평생을 가기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밭에 경작한 좁쌀을 공출해 갈 때 좁쌀 이삭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 톨 한 톨 세며 이듬 해 경작물을 눈대중으로 계산하는 그들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니 소인배를 넘어 그야말로 '좁쌀영감' 아닌가.

다 알다시피 '좁쌀영감'이란 사사로운 일에 연연한 나머지 마음자락이 매우 비좁아 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 아닌가.

이런 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것만 알지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

즉 내 것을 덥석 남에게 베푸는 일엔 매우 인색하다.

자연 이런 성품이다 보니 오장 육부에 욕심 보따리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걸핏하면 남의 것을 넘보는 일에만 익숙하다.

우리 땅 독도는 그동안 늘 일본이 넘보아 왔었다.

섬나라 근성을 지닌 일본인답게 이즈막도 우리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헌정 사상 최초로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우리 땅을 우리나라 대통령이 밟는데 왜 일본은 이토록 흥분하고 분노 할까 싶다.

심지어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우리 총영사관에 어느 일본인이 벽돌을 던져 유리창까지 깼잖은가.

이는 마치 어린애가 자신의 뜻대로 안되면 온갖 투정을 다 부리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계 강대국이니 선진국이니 평소 국력을 자랑하던 일본이 알고 보니 양면성이 강한 국민성을 지닌 나라임을 이참에 다시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도 남음 있는 일이었다.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분간도 못하고 무조건 탐난다고 억지를 부리는 꼴이 마치 세 살 어린아이와 같은 언행이다.

아니 어린아이는 순수한 동심이나 있지 이렇게 내 것과 남의 것을 분별 못하는 일본은 소인배들이 사는 나라를 넘어 '좁쌀영감 공화국'이라면 지나칠까?

그러고 보니 안하무인격인 그들 소행에 분노해 목소릴 높일 가치조차 없음을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김혜식 하정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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