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멋지게 키워 보겠다는 욕심이 자녀를 잡는 경우가 빈번하다.

놀면서 배우고 터득하는 시간을 어린이에게 돌려주어야 함을 극성맞은 어머니들은 하나도 모른다.

소꿉장난을 해야 할 나이엔 소꿉장난을 해야 인생을 배우고 터득한다.

골목에서 뛰 놀아야 할 어린이는 뛰놀아야 인생을 배우고 터득한다.

아이들에게는 그 나름의 인생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부모들이 막무가내로 아이들을 천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욕심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의 두뇌가 한결같은 것은 분명 아니다.

좋은 머리도 있고 처진 머리도 있으며 나쁜 머리도 있게 마련이다.

세상이란 바보나 천치만 있어도 망하지만 천재만 있어도 망하고야 만다.

보통 수준의 두뇌들이 있어서 세상은 그래도 유지되는 법이다.

보통의 아이를 보통 수준에 맞게 교육을 시키고 천재는 또 거기에 걸맞게 천재교육을 시키면 교육의 탈은 없어질 수가 있다.

그러나 극성맞은 어머니는 자신의 자녀가 천재라는 착각을 하고 무리하게 욕심을 부린다.

그래서 그러한 어머니 밑의 아이들은 치어서 기를 펴지 못하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찌들어 버린다.


천차만별




참나무가 단단하다고 기둥을 세우면 벌레가 파먹어 무너지게 마련이다.

기둥이나 대들보는 소나무가 제격인 것이다.

사람도 쓸모에 따라 쓰이게 마련이다.

소질과 능력에 맞게 가르치고 터득하게 하면 가장 적절한 교육이다.

그러나 치맛바람의 교육은 이를 어기고 억지로 자녀들을 천재로 착각하고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무엇이든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난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도 예외가 아니다.

극성맞은 어머니의 교육열이 결국 아이들의 허리를 부러지게 하고야 만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억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배우려고 분발하지 않으면 개발해 주지 않는다.

알면서도 말을 못하는 경우가 아니면 말을 일러주지 않는다.

한 모서리를 가르쳐 주면 나머지 세 모서리를 알아낼 만큼 반응하지 않으면 더는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공자는 밝혀 놓았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아래 사람 없다.

이것은 인권주간에 붙는 표어이다.

사람은 다 같고 법 앞에 평등하다.

이는 인권선언의 요지이다. 이러한 표어나 요지를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 같은 목숨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누구의 목숨이나 소중하므로 그러한 목숨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목숨으로 보면 모든 사람은 다 같다.

그러나 사람을 능력으로 보면 사람마다 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이다.

이러한 법은 하나같을 수 없고 천차만별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 날 한 시에 난 손가락도 발가락도 길고 짧음이 있다.

사람 역시 저마다 할 수 있는 능력이 다 다르다.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안다면 시생이나 질시나 음해나 모함을 하지 않을 것이다.

천치도 있고 바보도 있고 둔재도 있고 수재도 있고 준재도 있고 천재도 있다.

그래서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고 한다.

이는 분수를 알라는 말이다.

사람이 제 분수를 모르면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못된 일을 범할 수도 있어서 남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사람은 둥근 구멍에다 네모난 것을 박아 메우려고 심통을 부리는 꼴을 짓고야 만다.

되로 배워서 말로 써먹어야 한다는 말을 옛날 서당의 선생들은 자주 했다.

말하자면 하나를 알면 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야




그러나 사람의 능력은 한 홉짜리가 있고, 한 되짜리도 있으며 한 말짜리나 한 섬짜리도 있게 마련이다.

마음 쓰는 도량이 한 홉 정도인 사람이 한 말짜리처럼 행세를 하다 보면 세상은 비뚤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옛날엔 사람이 비범한 일을 하면 그를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칭송한다.

이는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능력을 탐하거나 시샘하지 말라 함일 것이다.

언제나 용렬한 사람은 제 분수를 모르고 욕심만 앞세운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을 과대포장하면 세상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한풀이를 한다.

이러한 사람은 정승감이 앉아야 임금의 눈이 밝아지고 그렇지 못하면 임금의 눈이 멀어져 백성의 허리가 굽는다고 백성들은 한탄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세상이 항상 소란스럽고 아웅다웅한다.

그래서 성인께서 먼저 자신을 알라고 하는 것이다.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도를 지켜 나갈 수는 없다.

함께 도를 지켜 나간다 한들 같이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같이 일을 다해간다 할 수 있어도 같이 순발력을 발휘해 큰 뜻에 맞추어 마무리 지을 수는 없다.

이렇게 개인의 소질과 능력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고 안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깨닫고 지혜를 얻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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