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가만히 멈추어 있는 돌이 아니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렇다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 같은 것도 아니다. 한 갈래로만 흐르는 물은 가는 길만을 따라 흐른다. 그러나 사람의 움직임은 수만 갈래로 뻗치고 굽이친다. 몸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움직인다. 무엇보다 인간에게는 마음의 씀씀이가 중요하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마음을 쓰는 일이라고 보아도 된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드러난다. 선하게 마음을 쓸 수도 있고 악하게 마음을 쓸 수도 있으면 눈치를 보면서 그것을 쓸 수도 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을 선하게 쓰라고 가르친다. 선하게 마음을 쓰는 것을 덕행이라고 한다. 덕행을 실천하는 제자를 공자는 제일 앞자리에 앉힌다. 안연이라는 제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 그 안연이 나이 사십에 명(命)을 달리하자 공자는 절망하고 비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하늘을 서슴없이 원망하면서 이럴 수가 있느냐고 공자는 통곡했다. 이렇게 절망하는 공자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짓들 중에서 무엇이 가장 귀하고 값있는가를 헤아려 보게 된다.

가장 불행하고 살벌하게 잔인한 시대는 덕 있는 사람을 바보처럼 바라보려고 한다. 덕 있는 사람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만족은 항상 자기를 손해 보게 한다고 무서워한다. 그래서 남에게 덕행을 요구하면서도 스스로는 덕을 행하는데 인색하다는 것을 감추려고 한다. 사람들이 교묘하게 쓰고 있는 탈은 바로 이러한 숨김에서 비롯된다. 공자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탈을 벗어던지라고 타일러준다. 공자는 승부의 세계를 피하라고 하지 않는다. 승부의 세계는 경쟁을 인정하고 들어가게 마련이다. 공자가 말하는 경쟁이란 무엇일까?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바로 자기와의 경쟁을 말한다. 남하고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사람은 지게 마련이고 자기와이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임을 공자는 헤아려보게 한다. 현대인은 이러한 승리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인생은 싸움이며 그 싸움은 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믿음으로 무장하고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인의 믿음은 반성해야 한다. 남의 호주머니에 든 것을 빼앗아 자기 호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상대가 있다는 것을 미처 모른다.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이고 제 발에 제 손에 든 도끼로 찍는 경우를 당하면서 현대인은 억울하다고 한을 품거나 땅을 친다. 그러나 땅을 친다고 패배한 자신이 되돌려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패배의 근원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덕을 행하는 사람은 패배하지 않는다. 항상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므로 항상 승리자가 된다. 공자가 말하는 승리자란 누구인가? 안연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오히려 안연이 아닌 다른 제자들을 통해서 인간의 짓들을 공자는 보여준다. 말하자면 덕이 모자라는 제자들을 통하여 우리를 반성하도록 하려는 셈이다. 하루를 살았으면 그 하루를 마감해 버릴 것이 아니라 반성해 보아야 함을 가르친다. 공자와 제자들과의 문답에서 그러한 면을 체험할 수가 있고 공자의 말씀에서도 그러한 면을 만날 수가 있다.

공자는 당신이 하나의 인간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자는 인간이라면 어긋나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 연유를 살피게 한다. 인간이 앓는 모든 아픔이란 어긋한 짓들에서 비롯됨을 헤아려 보게 한다. 이를 위하여 예(禮)에 벗어나지 말라고 공자는 당부한다. 예란 무엇인가? 덕(德)에 부끄러움이 없는 생각이요, 행위라고 여기면 된다. 공자는 이를 믿었고 그래서 인간을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善)을 사랑하므로 덕(德)을 믿는다고 공자는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의 선인(善人)을 많이 만날 수가 있으면 좋겠다. 선(善)은 사람을 저울질 한다. 선과 덕을 행하고 행하지 않고는 오직 자기의 몫이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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