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가짐의 문제는 락(樂)으로 풀고 마음 쓰기의 문제는 예(禮)로 푼다. 락(樂)은 마음속을 문제로 삼고 예(禮)는 마음 밖을 문제로 삼는다. 마음속이란 바로 인간 그 자신을 말하는 셈이고 마음 밖이란 인간 그 자신과 타인들과의 관계를 말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락은 나 자신의 관계를 말하게 되며 예는 나와 남과의 관계를 말하게 된다. 그러니까 예(禮)와 락(樂)으로써 인간의 됨됨이가 밝혀지는 것이다.

옛날의 예 · 락은 수수했지만 지금의 예 · 락은 화려하다고 평하고 싶다. 수수한 것을 공자는 야인(野人)이라고 밝히고 화려한 것을 군자라고 밝힌 다음 당신은 야인을 좇는다고 단언한다. 여기서 우리는 어리둥절하게 된다. 모름지기 군자가 되라고 설파한 공자께서 군자보다는 야인을 따르겠다니 어리둥절해진다. 그러나 말의 속셈은 진정한 군자는 마음속에 감춘 것이 없고 행동에 숨길 것이 없어야 한다는 군자의 길을 생각해본다면 차츰 헤아려지는 것이다.

군자라면 샛길이나 지름길을 찾지 말라. 군자라면 곧게 뻗은 큰 길을 가라. 이것이 군자의 도가 아닌가. 수수한 것이란 바로 곧게 뻗은 큰 길로 비유하면 된다. 샛길이나 지름길을 택하는 것은 걷는 일을 줄여서 땀을 덜 흘리고 목적지에 도달하겠다는 욕심이 아닌가. 사람의 욕심이란 무엇인가를 감추려 들고 숨기려 들기 마련이다. 욕심의 눈에는 남의 밥의 콩이 항상 커 보이는 까닭에 자기의 콩을 더 크게 하려고 감추고 숨기는 짓을 한다.

그래서 욕심은 사람을 항상 약게 만들고 약은 마음과 약은 행동에서 야심의 싹이 트는 법이다. 야인의 마음은 수수할지언정 야심을 모른다. 그러나 샛길만 찾는 약은 사람의 마음은 세련된 반면 야심으로 눈이 번뜩인다. 화장을 짙게한 여인의 얼굴이 예쁜가, 아니면 있는 그대로인 여인의 얼굴이 이쁜가? 화장한 얼굴은 무엇인가 감추고 숨긴 얼굴이요 그대로 있는 얼굴은 수수한 것일 뿐이다. 예(禮), 락(樂)에도 화장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있는 그대로인 것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살피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숨기지 말 것이며 행동을 감추지 말라. 공자가 제자들과 문답하는 장면에서 위와 같은 충고를 들을 수가 있다. 당돌한 자로의 말을 듣고 공자는 미소를 머금고 소심한 염유의 말을 듣고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중석이란 다른 제자가 그 연유를 묻자 공자는, 하나는 지나치게 적극적이어서 예(禮)에 어긋나고 하나는 지나치게 소극적이어서 이 또한 예에 어긋난다고 토를 달았다. 어긋남이 없는 것을 공자는 좇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긋남이 없는 예락(禮樂)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중용(中庸)의 예락(禮樂)임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화려한 것은 중용을 화장할 수는 있어도 그대로이게 할 수는 없다. 틀이나 규격에 꽉 얽매였던 조선조의 예를 보라. 별의별 규범으로 사람을 묶기만 하였지 풀어주질 못했다.

심하게 묶으면 피가 통하지 않는 법이다. 조선조의 예(禮)는 꽉 죄는 매듭이 되어 숨통을 막아 사람들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사이비 군자들이 야인의 숨통을 죈 것이다. 말하자면 예를 지나치게 묶었던 셈이다. 공자는 이를 반대한다. 화려한 것이 지나치면 중용은 여지없이 상처를 입는다. 현대는 중용을 기회주의 발상처럼 여기려고 덤빈다. 모든 면에서 현대인들은 끝장을 보아야 속이 시원하고 후련하다고 서슴없이 단정한다. 화려한 것이 얼마나 거친 것인가를 뉘우칠 줄을 모른다. 현대인은 살벌하게 군상을 이루면서 으르렁거린다. 이러한 현실은 예가 여지없이 난도질당하는 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남새밭을 망가지게 하는 것처럼 인간은 이제 위, 아래를 모른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알바가 아니란 생각을 갖고 행동하려고 한다. 이것은 무례(無禮)의 절정인 셈이다. 이러한 절정에서 내려와야 사람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지나치고 어긋난 현대인들은 이를 알면 철이 들게 될 것이다. 나만 아는 것이 가장 어리석음을 알게 될 것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안다는 것은 세상 살아가는 법을 안다는 것이 된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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