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아무개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자면 사람이 제일 문제라면서 맡길 사람을 찾을 때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고 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인품에 앞서 그 사람의 능력을 먼저 따지려는 풍조가 앞서고 있다. 이러한 풍조에 너무 매달리다 보면 뒤 끝이 별로 신통찮게 끝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사람의 인품과 능력은 서로 다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능력은 재주에서 비롯되고 인품은 덕에서 비롯되는 까닭이다.

덕(德)은 베푸는 마음을 앞세우지만 능력은 요구하는 마음을 앞세운다. 옛날은 스포츠를 놀이로 했지만 이제는 커다란 기업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엄청난 돈을 주고 선수들을 사오게 된다. 연봉을 얼마나 받느냐를 놓고 사람의 값을 따지게 된다. 스포츠에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전문 경영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업수완의 능력에 따라 고임금을 받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이 또한 월급을 얼마나 받느냐를 두고 사람의 값을 따지는 경우이다. 이런 때의 사람값은 능력을 기준으로 삼지 그 사람의 인품으로 따지는 것은 아니다.

재주가 앞서면 덕이 모자란다고 한다. 재주만 믿고 천방지축으로 나불대고 저만 잘났다는 착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남을 얕보고 존중할 줄을 모른다. 모든 것을 지식의 양으로 따지려고 하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어야 할 도리를 저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는 모든 것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 있는 사람은 주변을 살펴서 무엇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가에 신경을 쓴다. 덕은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며 덮어주고 약한 사람을 감싸주면서 힘을 북돋아 주어 서로 함께 살맛을 나누게 한다. 선(善)을 위하여 이롭게 하는 것이 덕(德)이므로 사람을 외롭게 하지 않는다. 덕이란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돕는다. 그래서 우리는 덕행(德行)을 삶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항상 상기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사코 그러한 덕행을 멀리하면서 재주만 앞세워 세상을 얕잡아 보려고 한다. 이러한 성품 탓으로 사람들은 서로 싸움을 하듯이 팽팽히 삶의 줄을 당기면서 제 몫만 챙기려고 한다.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벌한가? 덕 있는 사람을 무능하다고 흉보는 탓으로 우리는 피 마르게 살 수 밖에 없다.

공자는 쉰여섯에 조국 노나라를 떠났다. 나라를 잘되게 하려고 했지만 공자의 뜻을 들어주지 않아 나라를 떠나 진나라, 채나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왕도를 설파했다. 그러나 아무도 귀를 기울여 주질 않았다. 힘으로 세상에 군림하던 군왕들에게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라는 공자의 말씀은 눈에 가시나 같았다. 그래서 공자는 수많은 고생을 한 다음 예순 아홉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그간 고생만하고 벼슬하나 못한 제자들을 향하여 미안한 마음을 나타내면서 제자들의 됨됨이를 밝혔다. 덕 있는 제자를 맨 먼저 말하면서 능력 있는 제자들을 살폈다.

왜 공자는 덕 있는 제자를 가장 아꼈을까?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서로 믿고 의지하며 벗이 되게 하는 덕을 모든 선(善)의 근본으로 삼았던 까닭이다. 말솜씨가 능한 제자나 일을 처리하는 수완이 능란한 제자나 넓은 지식을 갖춘 제자보다 덕 있는 제자를 가장 앞자리에 공자는 두었다.

이러한 일화가 있다. 똑같은 환경의 잔디밭을 두 개 만들어 놓고 한쪽 잔디에는 고전 음악만을 들려주고 다른 편 잔디에는 재즈만 들려준 다음 일 년 뒤에 보았더니 고전음악을 들은 잔디는 청순하고 곱게 죽죽 자랐고 재즈만 들은 잔디는 크지 못한 채로 서로 뒤엉켜 있었다는 것이다. 음악은 우리를 흥분시켜야 좋을까 아니면 진정시켜야 좋을까? 사람을 진정시켜 철들게 하는 음악을 택하고 싶다. 아무리 세련되게 꾸며진다고 해도 절박한 진실만 못한 것이다. 그래서 덕은 너와 나를 편하게 한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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