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따져 보거나 아니면 사람이 행한 일을 놓고 옳고 그름을 재어 보는데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그 관계를 따지고 사람의 일을 시비로 걸어서 결정을 내릴 자가 없다는데 문제가 생긴다. 이러한 문제 탓으로 자주 시비가 일어난다. 시비라는 것은 네가 잘했는지 내가 잘했는지 한번 따져 보자는 것이고 네가 옳은지 아니면 내가 옳은지 파헤쳐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是)이고 저것은 비(非)라고 재어볼 수 있는 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원칙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유심히 보게 마련이다. 그 원칙이라는 것이 자기에게 적용하려는 자인지 아니면 남에게만 적용하려는 자인지 분명치가 않는 까닭이다. 좋은 말은 골라하면서 뒤로는 허튼짓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대는 위인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흔하다. 그래서 그러한 인간이 말하는 원칙이 자기를 방어하려는 엄포이고 남을 노리는 작살에 불과함을 발견하게 될 때 사람이 얼마나 영악하고 무서운 존재인가를 눈으로 보게 된다.


남을 판단하려 덤비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자기 오지랖은 그냥 두고 남의 겨드랑이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상대를 쓰러뜨릴 급소를 노리기 때문이다. 도둑들이 도둑을 재판하는 것을 아는가? 떼도둑들이 도둑질을 해오면 전리품을 놓고 분배를 하게 된다. 저마다 몫이 제대로 돌아가면 다행이지만 두목이 독식을 하게 되면 졸개들이 배반한다. 그래서 도둑이 도둑을 밀고하는 일이 생긴다. 밀고당한 도둑은 감옥으로 가고 밀고한 도둑은 현상금을 받아 챙긴다. 그렇게 되면 어떤 놈이 진짜 도둑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도둑이 도둑을 재판하는 경우는 시비를 엉망으로 흔들어 버린다. 시비를 흔들어 버리면 세상은 무엇이 가짜이고 진짜인지를 갈라내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면 세상은 썩었다고 흉보게 된다. 썩은 세상을 흉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옳은 것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인(仁)과 의(義)가 있는 군자(君者)인 것이다. 그래서 통치자는 군자여야 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는 것이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것이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정치는 엉망이 되고 위아래의 질서는 파괴되어 세상이 어지럽게 되어 버린다.

백성이 대통령을 뽑지 못하고 입을 맞춘 몇 백 명, 몇 천 명이 모여 대통령을 추대하는 것 때문에 권부의 정통성이 문제가 되어 거리는 항상 데모로 시끌하고 경찰은 최루탄을 내질러 죄 없는 백성들은 눈물을 흘린다. 왜 몇몇 대표를 뽑아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인가? 백성으로부터의 믿음이 불안한 까닭에 억지를 쓰는 셈이다. 그러니 억지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고 내가 정신적인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된다. 정치가 올바름의 것(正治)이 아니고 억누름의 것(征治)이 되면 중앙정보부 같은 것이 생겨난다. 법에 따라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하면 특권과 특혜가 날도둑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그래서 권부는 복마전이 되고 도둑의 소굴이 되는 것이 아닌가.

통치자는 군자의 덕으로 해야 한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다. 그리고 백성의 덕은 풀과 같다. 풀은 바람이 부는 대로 쏠리고 따른다. 덕풍(德風)은 백성을 편하게 하는 산들바람과 같다. 그러나 권문세도의 바람은 폭풍일 뿐이다. 폭풍이 불면 민초(民草)는 꺾이고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통치자는 군자라야 한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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